박당강 전투 (128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top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22번째 줄:
| 지휘관1 = [[쩐흥다오]]<br />[[쩐카인즈]]
| 지휘관2 = [[토곤]] (진남왕) <br />[[오마르칸]] (포로)<br />장문호
| 병력1 = 50,000+
| 병력2 = 8만명 정규군, 500척 선단
| 사상자1 = 4,000명~6,000명
34번째 줄:
1258년 몽골의 제1차 침공과 1283년의 제2차 침공까지 두 번의 [[대월]] 원정을 실패한 [[쿠빌라이칸]]은 분노를 삭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287년에 세 번째 침공을 계획하고, 쿠빌라이의 아들 중 하나인 진남왕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9만 병력을 투입했다. 이외에도 수백 척이나 되는 전선과 장문호 장군이 이끄는 수십 만석의 식량을 운반할 선단도 갖추고 있었다. 출병에 즈음하여 쿠빌라이는 토곤을 불러 “소국이라 하여 [[교지]](交趾)를 만만히 보지 말라”는 충고를 내렸다.
 
1287년 쿠빌라이칸의 아들 중 하나인 원나라의 총사령관 토곤이 베트남을 침공했다. 그는 8만의 정병과 21,000명에 이르는 보급군으로 운남과 하이난을 통해 침공을 했다.
 
1288년 오늘날 [[하노이]]에 해당하는 수도 탕롱에서 관민을 소개(疎開)한 후, 대월의 총사령관 [[쩐흥다오]] 장군은 몽골군과의 결전을 다짐하고, [[박당강]] 근처에서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했다. 박당강은 옌훙 지역과 투이응우옌 지역을 지나 바다에 도달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곳은 이미 350년 전인 938년에 [[응오꾸옌]](吳權)<ref>베트남 응오 왕조의 건국자로, 남한(南漢)의 공격을 물리쳐 응오 왕조를 열었다.</ref>이 [[오대십국]] 중 하나인 남한(南漢)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전을 벌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ref name="AndersonWhitmore2014">{{cite서적 book인용|author1=James A. Anderson|author2=John K. Whitmore|title=China's Encounters on the South and Southwest: Reforging the Fiery Frontier Over Two Millennia|url=https://books.google.com/books?id=YV1hBQAAQBAJ&pg=PA129#v=onepage&q&f=false|date=7 November 2014|publisher=BRILL|isbn=978-90-04-28248-3|pages=129–}}</ref> 1288년 3월부터 전투를 준비한 쩐응다오 장군은 응오꾸옌이 구사한 것과 같은 방식의 전술을 준비했다. 그는 조수간만의 차를 분석하여, 썰물 때 바닥에 말뚝을 심어두었으며, 복병을 배치하는 등 전투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 전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