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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역사}}
'''진랍'''(眞臘), 또는 '''쩐라'''(ចេនឡា)는 6세기 [[
== 역사 ==
진랍은 초기에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차츰 강대해져 7세기에는 역으로 부남을 병합하였다. 왕통은 은자 칸브와 선녀 멜러를 시조로 한다고 알려졌다. 사료상으로 [[598년]]에 [[자야바르만 1세]]가 재위하였고, 수서에 기록된 질다사나(치트라세이나 마헨드라바르만) 왕이 600년에 재위했다고 한다. 두 왕 모두 [[
수도는 현재의 산보르 플레이 쿡 유적으로, 왕을 알현하는 대회당 및 2만호 이상이 거주하는 큰 성으로 국내에 30개의 다른 큰 성이 있었다고 한다. [[639년]]에는 바바바르만 2세가 즉위하였고, 아들 [[자야바르만 1세]]가 남부
중국 측 사료에 의하면, 신룡연간([[705년]] - [[706년]])에 호수지역의 진랍과 내륙의 진랍으로 분열되었다. 호수 진랍은 해안에 가까운 [[
8세기 말에 [[자야바르만 2세]]가 국가를 다시 통일하고, [[802년]]에 [[크메르 왕조]]를 열면서 자바와의 종속관계를 끊는 의례인 데이바라쟈를 행하였다. 자야바르만 2세 이전을 전앙코르 시대라고 부른다. [[야소바르만 1세]]는 앙코르에 최초의 수도인 야쇼다라프라를 축조하였고, 이후 진랍의 왕들은 인근지역을 정복하고 이어서 수도와 대사원을 건립하여, 전성기를 이룩했다. [[수르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 와트]]를 건설하였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거의 전역을 정복한 [[자야바르만 7세]]는 곧 남쪽에 [[앙코르 톰]]을 세워서 진랍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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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랍풍토기는 중국 [[원나라]] 시대에 저술된 진랍(크메르 왕조)의 여행 견문록으로, 당시의 풍습, 사회, 문화, 산물 등을 적은 책이다.
[[주달관]]은 [[저장성]] 온주 출신으로, 항해의 경험이 많고, 학식이 깊은 인물이었다. 주달관은 원나라 [[원 성종|성종]]의 명에 의해 사신으로 선택되어 [[1296년]] 진랍을 출발하여, [[1297년]] 귀국했다. 진랍풍토기는 귀국 직후에 쓴 개인적인 견문록이지만, 약 1년간 머물면서 관찰한 상세한 조사보고서이며,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중세 캄보디아의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진랍풍토기에는 진랍의 명칭에 관한 내용과 온주로부터의 출발하여 수륙의 여정을 상세히 적은 기록과 성곽([[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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