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sadal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Asadal (토론 | 기여)
20번째 줄:
[[파일:Entrance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ROK in Shanghai.JPG|썸네일|200픽셀|왼쪽|[[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자취]]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1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산일]]<ref>[[인산일]](因山日)이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과 왕비,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일을 말한다.</ref>)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 인구가인구 2천만명 중 3.1 만세 시위 참가자는 약 20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했으며, 사망자 7,500여명, 부상자 16,000여명, 체포·구금된 사람이 46,000여명이었다. 만세 시위는 3월부터 시작하여 5월까지도 격렬하게 지속되었는데,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일제 경찰에 연행·구금되어 사실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3·1 운동]]으로 표출된 독립 의지를 대표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다. 먼저 임시 정부 수립론이 대두되었는데,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여운형]] 등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혔다.<ref>같은 책, 23~24쪽</ref>
28번째 줄: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 (1880년)|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1885년)|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1884년)|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 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1875년)|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ref>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ref>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을 것을 결의하고 [[김규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하였다. 프랑스에김규식은 도착한어릴 때부터 [[김규식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 라틴어, 신학, 수학, 과학 등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신한청년당서재필]]이 만든 [[전파독립신문]] 기자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통신로노크 대학교]]으로 교신하였고학사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를 받은 인재였다. 특히 그는 어학에 능통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미국 [[신한청년당우드로 윌슨]] 로비에대통령에게 필요한한국의 자금을독립청원서를 모금하여전달하였고, 송금해1919년 주었다1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아직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거절당하자,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받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ref name="ReferenceA">《한국독립운동사사전,3-7 :운동·단체편(4),p 337~ p 339》,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ref>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인용문|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69쪽 참조</ref>}}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신한청년당]]과 [[전파]][[통신]]으로 교신하였고, [[신한청년당]]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 주었다.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 (독립운동가)|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운동|3·1 만세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ref name="ReferenceA"/>
 
=== 정부 수립 주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