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명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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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왕은 [[동명성왕]]의 맏아들로 [[동부여]] 출신의 예씨부인의 소생이다. [[동명성왕]]이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한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출생년도는 [[기원전 38년]] 혹은 [[기원전 37년]]이다. [[동부여]]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와서 [[기원전 19년]] 음력 4월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이 때, [[동명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이라는 징표를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유리왕]]이 [[부여]]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주몽]]의 탈출 신화와 흡사한 면이 많고, [[유리왕]] 이후 [[모본왕]]까지의 왕성이 해(解)씨로 나타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유리명왕의 왕위 계승을 찬탈이나 개국의 형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용선, 〈[[고구려]] 유리왕 고〉, 《역사학보》
 
[[삼국지]]의 위서 고구려전에는 그의 본명은 여달이었는데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내려온 뒤 [[주몽왕]]에게서 친자로 인정받고 이름을 여해로 고쳤다고 한다. 그의 후손인 광개토왕의 비문인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그를 고명세자라 하여 주몽왕의 명으로 세자에태자에 책봉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고구려]]에 돌아오자마자 [[왕태자]]에 책봉된 유리는, 기원전 37년 음력 9월에 [[주몽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때 [[비류]]와 [[온조]]는 유리가 [[태자]]로 책봉된 이후 백성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
 
== 치세 ==
[[고구려 유리왕|유리왕]]은 [[기원전 18년]] 음력 7월에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왕후 송씨가 죽고 다시 골천(鶻川)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나라|한]](漢)나라 사람의 딸 치희(稚姬)를 후처(候妻)로 삼았다. [[기원전 9년]]에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부분노]](扶芬奴)의 계책을 사용해서 토벌하였다. [[부여]]의 [[대소왕]]은 [[기원전 6년]]에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음력 11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기원전 1년]] 음력 8월 교제(郊祭)에 쓰일 돼지가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리왕]]은 [[탁리]](託利)와 [[사비 (인물)|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탁리와 사비는 돼지를 잡은 후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었고 [[유리왕]]은 제사에 쓰일 돼지에 상처를 냈다 하여 이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처형하였다. [[1년|서기 1년]] [[정월]]에는 태자 [[도절]]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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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년 죽음|유리왕]]
[[분류:고구려의 왕|유리왕]]
[[분류:고구려한국의 사람섭정]]
[[분류:고구려의 군인]]
[[분류:가족 살해자]]
[[분류:동명성왕]]
[[분류:온조왕]]
[[분류:횡성 고씨|횡성 고씨]]
[[분류:고씨]]
[[분류: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