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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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의 고충====
그러나 [[선조]](宣祖)]]는 [[이순신]](李舜臣)]]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복권하기는 하였으나 휘하 장수들과의 마찰도 발생했다. 특히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통제사와 충돌을 일으켰다.
[[난중일기]](亂中日記)]] 1597년 9월 8일자에는 이순신은 장수들을 모아놓고 대책에 대해 논의를 했다. 일기에는 “김억추”에 대한 비판으로 그저 “만호”나 어울리는 사람이라 평가를 했다. 군사 회의에서 “김억추”가 말썽을 부렸을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의 휘하장수였던 충청수사 [[권준]]과 무의공 이순신을 수도방위를 이유로 전투참가를 불허하였다.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9월 28일]]([[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김억추나 송여종의 지원으로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