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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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이영모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나 학비가 부족하여 의령농고를 2학년때 중퇴하고 대입 검정고시와 군청 8급 공무원을 거쳐<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071749401&code=100402] {{깨진 링크웨이백|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071749401&code=100402] |date=20150717151525 }}</ref> [[부산대학교]]를 졸업했다. 병역은 육군 일병으로 귀휴했다. 재야 법조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많은 인물을 배출한<ref>[http://www.segye.com/newsView/20150630000649]</ref>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에 임용된 이후 서울지방법원 성동지원, 서울민사지방법원, 대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마산지방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했으며 중앙선거관리위원에 임명되기도 했던 서울고등법원장 재임 중에 법원장 직을 사퇴하고 1994년 10월부터 1997년 1월까지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1997년 1월 22일부터 2001년 3월 22일 까지 [[헌법재판관]]으로 재직하였다. 서울형사지방법원장에 재직할 때 약식사건 처리를 전산화하고 일을 꼼꼼하게 처리해 직원들 사이에서 시어머니라는 별명을 가졌던<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1160032910201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1-16&officeId=00032&pageNo=2&printNo=15996&publishType=00010]</ref>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으로서 처음으로 헌법재판관을 지낸 이영모는 퇴임사에서 "우리의 결정문이 법 논리 면에서 아무리 정교하고 치밀해도 국민의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허공을 향한 외침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면서 공직에서 은퇴하여 2003년에 판사 출신의 송재원 변호사, 헌법재판관을 지낸 [[황도연]]과 함께 설립한 법무법인 신촌에서 변호사를 하면서<ref>[http://news1.kr/articles/?2875464]</ref> 동아일보 독자위원장을 지냈다.
 
1992년에 공직자 재산공개를 시행하면서 신고한 재산목록<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0700329129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9-07&officeId=00032&pageNo=29&printNo=14857&publishType=00010]</ref>에 빨간색 프라이드 승용차가 있어 화제가 된 이영모는 법원장과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헌법재판관에 재직할 때 "국가 예산을 아낀다"며 비서관을 두지 않았으며<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2/07/0200000000AKR20150207035000004.HTML?input=1195m]</ref> 서울고등법원장 재직 때인 1993년 11월 3일 출범한 사법제도발전위원회 위원에 지명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10400289118005&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11-04&officeId=00028&pageNo=18&printNo=1721&publishType=0001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