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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이력 = [[한학#한국의 한문 문학|한학]] 수학 이후 [[천주교]]에 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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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Thomas, 도마,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 안씨|순흥]](順興),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ref name="안중근의사 기념관">[http://www.patriot.or.kr/laboratory/la_02.php 안중근의사 기념관]{{깨진 링크|url=http://www.patriot.or.kr/laboratory/la_02.php }}</ref><ref name=autogenerated1>[http://www.greatkorean.org/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ref>
== 안중근 ==
안중근은 우리나라의 영웅으로 취급되는 사람이다. 한번 알아보자.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통감부|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 감옥]](뤼순형무소)에서 사형(교수형) 집행되었다.
 
==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과 가계 ====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군|해주부]] [[수양산 (황해도)|수양산]] 아래에서<ref name="안중근의사 기념관">[http://www.patriot.or.kr/laboratory/la_02.php 안중근의사 기념관]{{깨진 링크|url=http://www.patriot.or.kr/laboratory/la_02.php}}</ref> [[진해군|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ref name="oh227">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27쪽</ref>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ref name="oh227"/>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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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묘역에 묻혔다.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출범한 안중근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는 안중근이 순국한 뤼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뤼순감옥구지묘지]]를 안중근의 유해 매장지로 추정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정부에 의뢰하고 있는 상황이다.
 
*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일본이 유해를 찾는것을 방해한다.
 
==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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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
안중근은 의거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일본인 출신 이등박문을 '쥐새끼' 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본문|안중근 의사 유묵}}드러내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 유묵 ===
{{본문|안중근 의사 유묵}}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5690000,11&queryText=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 ([[대한민국 문화재청]])</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