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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로 취임하자마자, 번의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식 조선(造船), 반사로 및 용광로의 건설, 지뢰, 수뢰, 유리, 가스 등의 제조를 비롯한 서양식 공업을 일으켰다. [[도사 번]] 출신으로 미국으로 표류했다가 귀국한 나카하마 만지로(존 만지로)를 불러들여 [[인세이]] 원년([[1854년]])에 서양식 군함인 쇼헤이마루(昇平丸)를 건조해 도쿠가와 막부에 헌상하였다. 그때 [[일장기]]를 일본배에 걸어야 한다고 막부에 제안하여 그 해에 막부에서 이를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일장기는 일본의 국기가 된다. 범선용 범포를 자급하기 위해 [[면포]] 방직 사업을 일으켰다. 또, 하급무사 출신의 의사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를 등용하여 그들을 통해 막부의 정치에 관여하기도 한다.
 
나리아키라는 마쓰다이라 요시나가(후쿠이 번주), 다테 무네나리(우와지마 번주), [[야마우치 요도]](도사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미토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오와리 번]]주)등과 함께 영주가 되기전부터 교류를 하고 있었다. 나리아키라는 그들과 함께 막부의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로주 마사히로에게 막부에 의한 정치개혁을 호소했다. 특히 미국의 페리 함대가 나타난 이후의 난국을 타개하려면 [[공무합체]]의 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1853년]] 11월에 양녀인 [[덴쇼인]]과 함께, 현재의 [[일련정종]] 총본산인 다이세키지에 귀의했다.
 
[[1857년]]년 로주 마사히로의 사망 이후 [[1858년]] [[다이로]]가 된 [[이이 나오스케]]와 쇼군의 후계자 문제로 정면대립하였다. 제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무네나리 외 4명의 영주와 전 미토 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 등은 차기 쇼군에 [[히토쓰바시 요시노부]](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하기 위해 덴쇼인을 고노에(近衛) 가문의 양녀로 보낸 후 이에사다의 정실부인으로 시집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에 대항하여 기슈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내세웠고 다이로의 지위를 이용해 강권을 발동해 반대파를 탄압한 [[안세이 대옥]] 사건을 일으킨다. 그 결과,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로 등극하여 나리아키라 등은 후계자 다툼에서 패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