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멜리에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프랑스 파리 동음이의 링크 처리; 예쁘게 바꿈
25번째 줄:
== 어린 시절 ==
[[파일:Plaque Georges Méliès, 29 boulevard Saint-Martin, Paris 3.jpg|섬네일|200px|왼쪽|조르주 멜리에스의 생가 근처 거리에 붙어 있는 기념판]]
조르주 멜리에스는 1861년 12월 7일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루이스타니슬라 멜리에(Jean-Louis-Stanislas Méliès)였고 어머니는 요한나카테리너 스휘링(Johannah-Catherine Schuering)이란 이름의 네덜란드 사람이었다.{{sfn|Rosen|1987|p=747}} 아버지는 [[제화]] [[직인]]으로서 1843년 파리로 이사를 왔고 구두 공장에서 일하다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다. 요한나카테리너 역시 [[네덜란드 왕실]]의 정식 구두 제작공으로 있었다가 화재로 일거리를 잃자 파리로 건너온 아버지를 따라 온 것이었다. 요한나카테리너는 장루이스타니슬라를 지도하다 마침내 결혼을 하였고, 생마르탱 거리에 고급구두 공장을 세웠다. 첫째아들 앙리와 둘쨰아들 [[가스통 멜리에스|가스통]]을 낳은 뒤, 셋째 조르주가 태어날 때 즈음에는 풍족한 집안을 이루고 있었다.{{sfn|Rosen|1987|p=747}}
 
조르주 멜리에스는 7살 때 미슐레 학교(Lycée Michelet)에 입학했다. 그러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학교가 포격으로 박살나 다니지 못하게 되었고, 그 당시에 알아주던 [[리세 루이르그랑|루이르그랑 학교]]로 전학을 갔다. 영화제작에 발을 들일 때에는 영화를 "예술적인 것이라곤 손도 못 대는 일자무식"이나 만드는 것이라 비난했던 것과는 달리, 회고록에서는 자신이 정식 고전교육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sfn|Rosen|1987|p=747}} 하지만 스스로도 지성보다는 창의적인 소질이 더 컸다고 인정했다. "그는 예술적 열정이 너무 강했다. 프랑스어 작문이나 라틴어 구절을 두고 고민할 때면 그의 펜은 자기도 모르게 인물화라든지 선생이나 친구 캐리커처, 아니면 극장 세트 모양의 환상적인 궁전이나 풍경 등을 끄적이곤 했다."{{sfn|Rosen|1987|p=747}} 학창 시절 노트와 교과서를 낙서로 가득 채워 선생에게 벌을 받는 일이 잦았던 멜리에스는 열 살 때 판지로 된 [[인형]]극장을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10대가 되면서부터는 정교한 [[마리오네트]]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1880년 멜리에스는 [[바칼로레아]]를 보고 학교를 졸업했다.{{sfn|Rosen|1987|p=748}}
46번째 줄:
멜리에스는 1896년부터 17년간 총 500편이 넘는 영화를 찍었으며, 작품 분량은 1분에서 40분까지 다양했다. 이들 영화의 소재 면에서는 마치 멜리에스가 선보였던 극장 마술쇼와 닮아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종의 속임수나 실제론 불가능한 것 (예: 어떤 물건이 사라지거나 크기변화가 벌어지는 것)을 요소로 넣었기 때문이다. 특히 초창기 작품들은 특수효과에만 집중하고 줄거리는 원래부터 없었다. 특수효과는 어디까지 가능할련지를 보여주기만 했을 뿐, 전체 줄거리를 높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멜리에스가 초창기에 제작한 작품들은 대부분 화면상의 효과 하나만 구성되었으며, 쉽게 말해 특수효과 하나가 그 작품 자체로 쓰였다. 예를 들어 멜리에스는 다중노출 기법을 실험한 뒤에는 《[[원맨 밴드 (영화)|원맨 밴드]]》를 찍었는데, 자신이 7명의 등장인물로 각각 나와 하나의 밴드를 이루어 악기를 연주한다는 내용이었다.<ref>Fry & Fourzon, The Saga of Special Effects, pp. 8</ref>
 
[[파일:Méliès, Une nuit terrible (Star Film 26, 1896).jpg|섬네일|200px|left왼쪽|영화 <끔찍한 밤>의 한 장면]]
1896년 5월 멜리에스는 처음으로 자작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고, 8월에는 로베르우댕 극장에 상영하게 되었다. 그해 말에는 뢸로와 함께 [[스타 필름]] 영화사를 설립하고 코르스탕을 첫 촬영기사로 삼았다. 멜리에스의 초창기 작품들은 당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내걸어 이천 명의 손님을 끌어모으던 그랑카페와 경쟁하기 위해 똑같이 뤼미에르 형제 작품들을 베끼거나 리메이크한 것들이었다. {{sfn|Rosen|1987|p=749}} 멜리에스가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 <[[카드놀이 (영화)|카드놀이]]> 역시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과 유사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 외에도 멜리에스가 연극과 쇼를 위해 쌓아왔던 요령들을 드러낸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영화 <[[끔찍한 밤]]>은 호텔에 묵던 손님이 느닷없이 거대한 [[빈대]]에게 공격받는다는 내용이었다.{{sfn|Rosen|1987|p=750}} 다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뤼미에르와 멜리에스가 제작한 영화의 방향성이 달랐다는 사실인데,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의 발명품이 과학 및 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할 것이라 보고, 전세계에 촬영기사를 파견하여 그 풍물상을 기록하도록 한 일종의 다큐멘터리 작가였던 반면, 멜리에스가 세운 스타 필름사는 자신들이 선보이는 마술과 환상, 즉 창작품에 관심있는 '풍물장터 단골'들을 주고객으로 삼았던 것이다.{{sfn|Rosen|1987|p=749}}
 
53번째 줄:
1896년 9월 멜리에스는 파리 근교 [[몽트뢰유 (센생드니 주)|몽트뢰유]]에 영화 스튜디오를 차렸다. 촬영 중 노출을 주기 위해 햇빛이 들도록 본관 건물 전체를 유리벽과 유리천장으로 꾸며놓았고, 그 규모는 로베르우댕 극장과 꼭 같았다. 여기에 의상실로 쓰이는 공간과 세트장 설치를 위한 창고도 마련해두었다. 이때 세트장과 의상은 물론 배우의 분장까지 각기 다른 톤의 회백색으로 정하였는데, 원색으로 해뒀을 경우 흑백 화면상에 기대했던 색대로 찍혀보이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었다. 멜리에스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대다수 공간을 차지하는) 사진작업실과 극장 무대를 합친 곳"이라 묘사하였다.{{sfn|Rosen|1987|p=750}} 영화 촬영을 진행할 때 그림으로 그린 배경 앞에 배우가 연기하는 식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마술쇼나 [[뮤지컬]] 극장의 진행 방식에서 영감을 따온 것이었다. 스튜디오가 문을 열고서부터 멜리에스는 몽트뢰유 스튜디오와 로베르우댕 극장에서 각각 따로 시간을 보냈는데, "아침 7시 스튜디오에 도착해 하루 10시간 동안 세트장과 소품들을 설치한다. 5시가 되면 옷을 갈아입고 6시까지 파리로 가서 극장 손님들을 받을 준비를 한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서 8시 공연을 위해 극장으로 돌아가고, 그새 세트장 설계도를 스케치하다가 몽트뢰유로 돌아가서 잠에 든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이번주에 준비한 씬들을 촬영하고, 일요일과 휴일에는 밤 11시 반까지 [[마티네|주간공연]], 영화상영 3편, 저녁 공연에 참여한다"고 한다.{{sfn|Rosen|1987|p=750}}
 
[[파일:Méliès, Le château hanté (Star Film 96, 1897).jpg|섬네일|200px|left왼쪽|영화 <귀신들린 성> (1897)의 한 장면]]
1896년 멜리에스는 총 78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이듬해 1897년에는 52편을 제작하였다. 이때 멜리에스는 앞으로 그에게 남은 제작활동 기간 내내 찍게 될 모든 영화 장르를 한번씩은 다뤄보게 된다. 그 장르로는 뤼미에르 형제 방식의 다큐멘터리는 물론 코미디, 사극, 드라마, 마술쇼, [[요정극]] (féerie)이 있었는데, 여기서 요정극은 멜리에스의 대표 장르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같은해 조르주 브뤼넬은 이렇게 썼다. "멜리에스와 뢸로는 무엇보다도 환상적이고 예술적인 씬, 극장 씬 재구성 등에 있어서 전문이었는데, 길거리 장면이나 장르 주제 같은 영화에 대한 평범한 시각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특별한 장르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sfn|Rosen|1987|p=751}} 한편 [[뤼미에르 형제]]나 영화사 [[파테]]처럼 스타 필름에서도 '[[성인 영화|남성용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해변에서 엿보는 톰>, <일하는 최면술사>, <[[무도회가 끝난 뒤 (1897년 영화)|무도회가 끝난 뒤]]>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무도회가 끝난 뒤>는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인데, 주연으로 [[잔 달시]]가 나와 옷을 벗고 살색 [[레오타드]]만 입고서 메이드의 도움을 받아 목욕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896년부터 1900년까지는 위스키, 초콜릿, 이유식 제품 등의 광고 영화 열 편도 제작하였다.{{sfn|Rosen|1987|p=751}} 1897년 9월 멜리에스는 로베르우댕 극장의 마술쇼 비중을 줄이고 매일 밤마다 영화 상영을 하여 영화관으로 바꿔보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지 1897년 12월 말부터 영화 상영을 일요일 밤에만 하게 되었다.{{sfn|Rosen|1987|p=752}}
 
[[파일:Méliès, La lune à un mètre (Star Film 160-162, 1898) 01.jpg|섬네일|200px|left왼쪽|영화 <천문학자의 꿈>]]
이듬해 1898년 멜리에스가 제작한 영화는 27편에 그쳤으나, 그의 작품은 더욱 야심차고 정교해져 갔다. 이 해에 찍은 작품으로는 [[USS 메인]] 호의 침몰 사건을 다룬 영화 <[[메인 호 침몰 현장에서 작업하는 다이버들]]>, 마술트릭 영화 <[[유명한 상자 트릭]]>, 그리고 요정극 <[[천문학자의 꿈]]>이 대표적이다. <천문학자의 꿈>은 한 천문학자의 연구실에 악마와 천사가 찾아오고 난데없이 달이 들이닥쳐 연구실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로, 천문학자는 멜리에스 본인이 연기하였다. 또 처음으로 종교를 풍자하는 내용의 작품인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을 제작하였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매혹적인 여인 ([[잔 달시]])으로 바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sfn|Rosen|1987|p=752}}
 
84번째 줄:
 
{{기본정렬:멜리에스, 조르주}}
 
[[분류:1861년 태어남]]
[[분류:1938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