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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樓蘭, Loulan)은 현재 [[중국]]령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고대의 작은 도시 국가였다. 그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국가를 '''누란국'''이라 하였다. 서역의 남도와 이어져 공작하 하류의 [[로프누르 호]]의 서안에 위치하며 비단길 교역의 중요한 도시였다. 약 1,600년 전 누란국은 소실되었고 옛 성터의 유적만 남아 있다.
 
기원전 77년에 [[한나라]]의 영향 아래에 가를들어가면서 [[샨샨]]나라 이름을 '''선선'''(鄯善)으로 개칭하였지만 그 후에도 누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 역사 ==
누란으로 불리는 도시 또는 국가가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옛날 신석기 시대로부터 거주가 시작되었던 것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이른바 「누란의 미녀」로서 알려진 미이라는 입고있던 의복의 탄소연대측정에 의해서 BC 19세기 무렵의 인물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문헌에 '누란'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사기 (역사서)|사기]]》 '흉노열전'에 수록된 편지 중에서 발견된 것이 최초(기원 전 2세기)이며, 그 사이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 편지는 [[흉노]]의 지배자 [[모돈 선우묵돌선우]]가 [[전한]]의 [[한 문제|문제]]에게 보낸 것으로, 이 편지에서 모돈 선우는 [[월씨]]에게 승리해, 누란·오손·호게 및 근처의 26국을 평정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편지는 문제 4년(BC 176년)에 보내진 것이므로, 누란은 적어도 BC 176년 이전에 형성되어 월씨의 세력권에 있던 것이다. 그리고 BC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한서]]》 ‘서역전’에 의하면, 서역을 전체를 지배하에 둔 흉노는 언기, 위수, 위려의 사이에 동박도위를 두어 누란을 포함한 서역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고, [[하서회랑]]에 수만의 군세를 두어 그 교역을 지배했다.
 
== 소국과 대국의 사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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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역의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된 한나라는 서역 여러 나라와 서방까지 견사나 대상을 많이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역의 증대로 한나라 사람들(이 중에는 신흥 교역시장에 활로를 찾아낸 빈민도 많았다고 한다)과 서역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발발해 서역 여러 나라에서는 반한 감정이 증대했다. 특히 누란과 고사는 한의 진출을 싫어해 흉노와 가깝게 지내며 한나라 사신의 왕래를 방해하는 등의 방해정책을 펼쳤다. 이을 우려한 한 무제는 기원 전 109년, 종표장군 [[조파노]]와 누란에 견사로 파견된 경험이 있는 [[왕회]]에 명해 군사 수만명을 동원해 누란과 고사에 무력을 행사했다. 기병 700기와 함께 선행한 조파노의 공격을 받아 누란은 점령되고 국왕은 사로잡혔다. 이에 누란은 왕자 1명을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한나라에 복속 당했다. 서역의 요충지 누란이 한나라에 복속되자 흉노는 좌시할 수가 없었다. 흉노도 누란을 재차 공격하자, 누란은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게 된다.
 
이러한 한과 흉노의 서역 주도권 행사를 위한 싸움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고, 누란의 정치는 그 상황에 따라 좌우되었다. 다시 한의 군사 개입을 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제는 [[대완]]의 [[한혈마]]를 얻고 싶어 사자를 대완에 파견했지만, 대완은 한나라 사신의 무례한 태도에 분개하여 되돌려 보내고 말았다. 그 사신은 귀향하는 길에 대완 동쪽의 욱성성(郁成城)에서 습격을 당해 살해당하고 재물은 빼앗겼다. 분개한 한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이광리]] 장군의 지휘 아래 두 차례 걸쳐서 대군을 파견했다(BC 104년 - BC 101년). 한나라의 대완 원정 길에 누란왕은 다시 한나라에 사로잡혀 무제의 힐문을 받게 된다. 무제는 누란이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 복속된 일을 꾸짖었다. 누란왕은 "소국은 대국의 사이에서, 양속되어 안심할 수 없다」라고"고 답하고 양속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나라 영토에 이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누란왕은 귀국을 허락 받았다. 한나라가 누란 방면의 군세를 계속 강화하자, 흉노의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게 되었다.
 
== 선선국 ==
기원 전 92년에 상술의 누란왕이 사망하자, 누란은 한나라에 인질로 보낸 왕자의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자는 한나라의 법을 어겨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한나라의 귀국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인물이 왕이 되어, 그도 한나라에 왕자 위도기를 인질로 보내고, 흉노에게도 왕자 안귀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이 왕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 흉노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왕자 안귀가 귀국해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한나를한나라는 입조를 요구하고 사자를 보냈지만, 안귀왕의 후처 등은 한이 인질로 보낸 왕자를 귀국시키지 않았던 사실을 이유로 들며 입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변함 없이 계속 되는 한나라 사신과의 충돌로 인해 누란에서 한나라 사절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나라는 BC 77년 대장군 곽광의 지시에 의해서 평악감 전개자에게 친흉노파 안귀왕 암살을 사주하여, 인질로 [[장안]]에 있던 왕자 위도기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다. 또 국명을 선선(鄯善)으로 바꾸고, 한나라군이 누란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도기에게는 인장과 함께 궁녀를 아내로서 주었다. 여기서 「鄯」이라고 하는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누란의 이름을 바꾸고, 인장과 아내를 준 것은 누란 왕국이 한의 괴뢰가 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내부에의 한나라군이 주둔한 것은 위도기가 자신의 기반이 약한 것을 걱정해 스스로 한에 의뢰했다고 전해진다. 한군은 위도기왕의 진언에 따라 이순성에 주둔하였고, 이곳은 곧 서역남도에 있어서의 한나라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