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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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탁발선비]]가 원거주지인 가샨동을 떠난 뒤 ‘실위’가 출현할 때까지 어떠한 북방종족도 대규모로 이동해오거나 갔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위]]인은 서쪽으로 옮겨가지 않고 남아 있던 탁발선비의 잔여세력으로 탁발선비와 기본적으로 같은 원류라고 할 수 있다.<ref>어장지우허 지음, 북방사연구팀 옮김(2009), 『몽골인 그들은 어디서 왔나』, 소나무,
60~73쪽</ref> [[실위]] 중에서 [[몽골족]]의 선조인 몽올실위는 《[[구당서]]》와 《[[신당서]]》 등에 기술된 20부 실위의 하나였다.<ref>《舊唐書》 권199, 「室韋傳」; 《新唐書》 권291, 「室韋傳」. 당대 한문사료에서 처음 등장한 몽올실위에 대해 중국 학계에서는 크게 두 종류로 의견이 나누어져 있다. 張久和와 林樹山 등은 수대 ‘심말달 실위’에서 나왔다고 본 반면에, 鄭英德, 劉光勝과 鄧國平 등은 ‘북실위’에서 몽올실위가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ref> 《구당서》와 《신당서》는 몽올실위가 망건하(望建河, 《신당서》는 室建河로 기록함)의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망건하는 지금의 에르구네하 및 [[헤이룽강]]에 해당된다. 이들은 본래 [[흥안령]]의 서쪽인 에르구네하로부터 헤이룽강 상류의 산림과 초원이 교차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9세기 중엽 [[위구르 제국]]의 붕괴를 계기로 실위인들이 대이동을 단행하자, 몽올실위도 수렵과 유목이 교차하는 곳인 헨티산맥의 [[오논강]] 유역으로 이동해왔다. 몽골족의 기원에 관해 [[라시드 앗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용문|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종족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시켰던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두 가족은 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
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구네 쿤이었다. 쿤의 뜻은 협곡이고 에르구네는 ‘가파르다’이니 곧 ‘가파른 산애(山崖)’를 의미한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ref>라시드 앗딘 지음, 김호동 역주(2002), 『부족지』, 사계절출판사, 252~25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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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840년]], 위구르 제국의 멸망은 몽올실위를 비롯한 실위인들의 [[몽골리아]] 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주한 실위인들은 당시 대제국을 건설했던 [[튀르크]]와 [[위구르]]의 선진문화와 유목경제를 흡수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것은 실위인들이 흥안령 서쪽의 에르구네하 일대에서 수렵과 약간의 [[목축]], [[농경]]을 하던 경제에서 기마 양 유목경제로 본질적인 전환을 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목경제로의 전환은 흥안령 일대의 수렵과 원시농경에 비해 보다 안정적인 생산을 보장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초원으로 이주한 수렵민은 유목민이 되었고, 이들의 기마 양 유목민화는 몽골 초원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몽골 초원이라는 생태환경에서 초원 기마 양 유목민으로
전환한 몽올실위는 향상된 기동력을 발판으로 크고 작은 부족 전쟁을 통해 강
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몽올실위를 주체로 실위인들이 점차 몽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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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족 (중국)|몽골계 중국인]]
 
== 각주 ==
{{각주}}
 
== 외부 링크 ==
 
{{몽골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