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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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panese artillery soldiers with gas masks, Changsha, 1941.jpg|섬네일|200픽셀|1941년 [[창사]] 전투 에서 [[일본 제국 육군]]]]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수뇌부들은 '2~3개월 정도면 중국대륙 전역을 점령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8월에 [[상하이]]에 상륙해 공략을 시작했는데, 상하이에서의 중국군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다. 특히 '[[오송 상륙 전투'[https://namu.wiki/w/우쑹%20전투?from=오송%20전투]' ]에서 일본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1930년대 초 [[중독합작|중국 주재 독일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팔켄하우젠]] 장군과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강력한 벙커밭을 조성하였고, [[장제스]]의 직속군대 역시 독일식 장비를 갖추고 독일 군사고문의 조언대로 훈련 받으면서 육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벙커밭을 뚫기 위해 돌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ref>상하이 전투를 '우쑹 크리크 공방전' 이라고 한다. '우쑹 크리크'라는 수로를 놓고 2만명의 [[일본군]]이 돌격을 했는데 일본군 상부는 '화기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총검만 쓸 것'을 명령했다. 문제는 그 우쑹 크리크 지역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을 제대로 경험해 본 중국주재 독일 군사고문관인 팔켄하우젠의 지시로 지어진 독일식 콘크리트 진지, 각종 유럽제 중화기, 빽빽한 [[지뢰]]밭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1시간 만에 1만명이 전사하고, 3주만에 전체 병력의 96%가 손실되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ref> 또한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장제스의 직속군대의 정예 제88사단은 일본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 상륙부대를 상하이에 묶어 놓고,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3개월 동안의 전투끝에 지원부대가 증강되면서 [[11월 5일]]에 이르러 겨우 상하이를 점령하였다.<ref>이 전투에서 [[국민혁명군|중국군]]측은 27만 명이 전사했다. 중국군은 좁은 곳에 너무 많은 병력을 밀집시키는 바람에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예를 들어 일본군의 함포 사격 1발에 200명이 전사하기도 했다.</ref> 상하이 전투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고 전쟁이 장기화되어가자, 일본군은 적개심에 불타 무고한 양민들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작전'을 개시하면서 살육전이 일반화 되어 갔다. [[1937년]] 12월, 상하이 교두보를 벗어난 일본군은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향했다.
 
==== 난징 대학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