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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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1907년 2월에 남산 왜성대에 건축한 통감부 청사를 1910년 합병 이후 총독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1926년 1월에 경복궁 신청사로 이전하였다.<ref name="신청사"/> 총독부 신청사 부지는 현재 종로구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자리와 서울특별시청 자리가 물망에 올랐지만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를 반대하여 일본인 건축가 [[이토 주타]]에 의해서 경복궁 [[흥례문]] 구역이 신청사 부지로 선정되었다.<ref>윤홍기, 〈경복궁과 구 조선총독부 건물 경관을 둘러싼 상징물 전쟁〉, 《공간과 사회》 15호, 2001년, 295쪽.</ref> 경복궁 흥례문 구역은 1915년에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총독부 청사의 신축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철거된 상태였다.<ref>김정동 저, 위의 책, 204쪽.</ref>
 
[[조선호텔|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1912년부터 총독부 청사의 설계에 착수하여 1914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기초 설계를 마쳤고,<ref>{{서적 인용|저자=건축사사무소 새한|제목=구 조선총독부 건물 실측 및 철거 보고서 (상)|날짜=1997-04-30|출판사=문화체육부 국립중앙박물관|쪽=36}}</ref> 라단데가 사망한 후에는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 [[구니에다 히로시]] 등이 청사의 설계를 완성하였다.<ref>김정동 저, 위의 책, 208 ~ 210쪽.</ref> 총독부의 직영공사 체제였으나 1차 공사는 일본 건설 회사 오쿠라구미(大倉組, 현 다이세이건설), 2차 공사는 시미즈구미(淸水組, 현 시미즈건설) 경성지점이 시공하였다.<ref>새한, 위의 책, 41쪽.</ref> 1916년 6월 25일에 땅의 신(地神)에게 공사의 안전과 건물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인 [[지진제]]를 [[신토]] 방식으로 근정문 앞뜰에서 거행하였다.<ref name="신청사"/> 1916년 [[7월 10일]]에 착공하여<ref name="이백십칠"/> 1920년 7월 10일에는 [[정초식]]을 거행하여 제5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휘호가 새겨진 정초석을 설치하였으며,<ref>{{서적 인용 |저자=허영섭|제목=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날짜=2010-02-27|출판사=채륜|쪽=327 ~ 329|id={{ISBN|89-93799-11-3}}}}</ref> 1923년 5월 17일에 [[상량식]]을 거행하였다.<ref name="이백십칠">김정동 저, 위의 책, 217쪽.</ref> 1926년 1월 4일에 건물을 완공하여 시용식을 거행하였고<ref name="신청사"/> 같은 해 10월 1일 시정기념일에 맞추어 건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인 낙성식을 가졌다.<ref>김정동 저, 위의 책, 219쪽.</ref>
 
총독부 청사의 신축 공사는 처음에는 5개년 계획과 300만 엔의 예산으로 시작하였지만 완공까지 10년이 걸렸고, 675만 1,982엔의 예산이 소요되었다.<ref>허영섭 저, 위의 책, 417쪽.</ref> 청사 신축 과정에 조선인 건축가로 조선총독부 토목부 건축과 [[기수]] [[박길룡]]과 이훈우(李勳雨), 고용직으로 이규상(李圭象), 김득린(金得麟), 손형순(孫亨淳), 박동린(朴東麟) 등이 참여하였고, 일본인과 중국인 석공 300명과 조선인 노동자 2백만 명(연인원)이 동원되었다.<ref name="이백십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