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대한민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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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와 [[4·19 의거]] 뒤에도 일부 학생과 시민사회단체에서 자유당 후보자들의 공천과 출마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여론까지 존재했으나 자유당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을 강력한 [[반공주의]] 야당으로 키우려던 [[미국]]은 자유당을 포기하고 [[민주당 (1955년)|민주당]]의 [[장면]]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승만]] 퇴진 후에도 자유당은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상당기간 동안 야당으로 존재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엔 해산됐지만, 일부는 [[1963년]] 정치활동이 허용되고 나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민정당]] 등에 흡수되었고, 일부는 자유당이라는 당명을 그대로 해 [[1963년]] [[9월]] [[장택상]]을 총재로 재창당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9070032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9-07&officeId=00032&pageNo=1&printNo=5499&publishType=00020|제목=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9-04-20}}</ref> 그러나 민우당을 창당한 이범석, 정민회를 창당한 변영태, 추풍회를 창당한 오재영, 민주공화당이나 민정당 등 다른 당에 참여한 김법린, 이활 등 자유당은 여러 갈래로 분열된 상태였고, 장택상을 필두로 창당된 자유당은 구 자유당 세력의 일부만을 대표했다. 제6대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 41명, 전국구 후보 4명을 내는 등 야당으로 활동했으나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고,<ref>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 선거사 제1집."</ref> [[1967년]] [[장택상]]의 탈당 이후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제6대 대선 때는 이범석 등을 대통령 후보로 낼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050300209201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05-03&officeId=00020&pageNo=1&printNo=13702&publishType=00020|제목=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9-04-20}}</ref>, 끝내 무산되었고<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081700209201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08-17&officeId=00020&pageNo=1&printNo=13793&publishType=00020|제목=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9-04-20}}</ref>, 제7대 총선에서도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며 참패했다. [[1970년]] [[신민당 (1967년)|신민당]]에 흡수되어 해체되었다.
 
== 역대 지도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