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엉녓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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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년]], 쩐 유종(裕宗)이 병으로 위독해졌는데 아들이 없었고, 유종은 즈엉녓레를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쩐 왕조의 황통을 단절시키는 것이라며 극력으로 반대하였고, 외척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황당한 거동은 후세의 사관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유종이 죽고 20일이 지난 음력 5월 25일(서기 6월 29일), 헌자황태후(憲慈皇太后)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즈엉녓레를 입궁시켜 즉위하도록 하였다. 대월사기전서에 의하면 헌자황태후는 공숙왕 쩐응우옌죽을 쩐 명종(明宗)의 적장자라고 여겼으나 황위를 계승할 수 없었으므로, 즈엉녓레가 쩐응우옌죽의 아들로서 황위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즉위한 뒤, 즈엉녓레는 [[다이딘]](大定)으로 개원하였고, 공숙왕 쩐응우옌죽을 황태백(皇太伯)으로 높였으며, 공정왕(恭定王) 쩐푸(陳暊)의 딸 쩐씨를 황후로 세웠다. 즉위한지 약 1년 반이 지나 양일례는 명령을 내려 헌자황태후를 독살하도록 하였다.
 
양일례는즈엉녓레는 전 군주인 쩐 유종과 똑같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매일 향락을 즐기는 혼용(昏庸)한 군주가 되었다. 그는 심지어 원래의 성인 즈엉씨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는 종실, 백관들 모두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다.
 
다이딘 2년([[1370년]]) 9월, 태재(太宰) 쩐응우옌짝(陳元晫) 부자는 쩐 명종의 딸 티엔닌(天寧)공주의 두 아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종실을 이끌고 입성하여 궁중으로 진입해 즈엉녓레를 죽이고자 하였다. 즈엉녓레는 담장을 넘어 궁전에서 도망쳐 나왔고, 신교(新橋) 아래에 숨어서 죽음을 면했다. 다음날, 즈엉녓레는 병사를 이끌고 입궁하여 각처에서 주모자들을 잡아들였다. 쩐응우옌짝, 쩐응우옌띠엣(陳元偰) 등 18명이 살해되었다. 즈엉녓레의 장인 쩐푸는 어려움이 닥쳤음을 미리 알고 타강진(沱江鎮)으로 도망가서 환난을 면했다. 1개월 후, 쩐푸는 동생인 공선왕(恭宣王) 쩐낀(陳曔), 티엔닌공주 등과 함께 청화부(清化府)에서 병사를 일으켜 즈엉녓레를 토벌했다. 11월, 쩐푸가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곧 쩐 예종이다. 예종은 즈엉녓레를 폐하여 혼덕공으로 한다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예종의 병사가 도성에 이르자 즈엉녓레는 대신 쩐응오랑(陳吾郎)의 권고를 받아들여 예종에게 항복하였으나, 예종은 명령을 내려 즈엉녓레와 그 아들 즈엉리에우(楊柳)를 몽둥이로 어지러이 쳐서 죽였고, 대몽산(大蒙山)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