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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의 기록 ====
[[명량대첩비]]에는 전투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우선 해남명량대첩비문(海南鳴梁大捷碑文)<ref>1597년 통제사 이충무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진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적은 다시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지역을 넘보지 못하였고 그 이듬해에 적은 마침내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분이 이충무공이요 그 중에서 울돌목의 싸움은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공이 처음에 전라좌수사로 있다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비장한 각오로 병졸과 함께 서약을 행하고 경상도 지역을 들어가 침입하는 적군을 맞아 싸워 옥포, 당포, 고성의 당황포에서 모두 적은 군대로써 많은 적군을 상대로 싸워 번번이 큰 전과를 올렸고 뒤에 한산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나라에서는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고 삼도의 수군을 다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그대로 한산도에 수년간 주둔하게 되고 적은 감히 바닷길에 나올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이 해에 적은 크게 병력을 동원하여 두 번째의 침략을 감행했다. 과거의 실패를 만회할 생각으로 전력을 기울여 해상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에 마침 공은 모함을 입어 백의종군 하고 있었는데 나라에서는 사태가 위급함으로 다시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원균이 공을 대신 적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배와 장비와 병졸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한산도도 적에 빼앗겼다. 공은 백지상태로 된 현지에 단신으로 부임하여 흩어진 병졸을 모아들이며 부서진 배를 수리하여 가까스로 십여척을 마련하였다. 이것으로 명량해협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은 큰 배와 많은 군대로 바다에 가득히 몰려왔다. 공은 여러 장군에게 명령하여 배를 명량으로 들어와서 좁은 목에 대기시키고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곳은 좁은데다가 때마침 세차게 몰려오는 밀물의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를 이용하여 산에 내려 누르는 듯이 아군을 향하여 몰려들었다. 이를 본 이순신 장군은 병졸을 격려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한 공격을 개시 하였다. 장병들은 이공과 함께 결사적으로 싸웠고 배는 날으듯이 적선들 사이에 출몰하여 대포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바닷물이 끓어오르는듯 하였다. 이러는 동안 적의 배는 불에 타고 부서져서 침몰되고 물에 빠져 죽은자가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적은 마침내 크게 패하여 전함 백여척을 쳐 부서졌고 적장 마다시도 죽었다. 임진왜란중 승전은 있었다 하나 이는 모두 가까스로 그 성을 지킨데 불과하며 공과 같이 한 해역을 도맡아 독자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노량의 싸움은 중대한 결전이었고 또 위대한 승리였으나 공은 이 싸움에서 목숨을 바쳤고 적도 이땅에서 완전히 물려났다. 나라에서는 왜란을 평정한 공적으로 공을 선무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벼슬을 좌의정에 추증하고 노량에 충민사를 지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름은 순신, 자는 여해, 아산출신이다. 명량대첩비는 남방인사들이 전적지인 명량에 공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다. 숙종11년(1685년)3월 예조판서 이민서 짓고, 판돈녕 부사 이정영이 쓰고 홍문관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를 썼다.</ref>을 살펴보도록 하자.<br>
[[명량대첩비]]에는 전투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우선 해남명량대첩비문(海南鳴梁大捷碑文)을 살펴보도록 하자.<br>
 
<b>▶1597년 통제사 이충무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진 아래에 주둔하고 있다가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b><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