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중심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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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브루노 사후 16년 후에 행해졌기에, 지동설 탄압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오류가 포함된 주장이다. 1551년 때 교황청은 역법 개정 때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이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저서를 바로 금서로 지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출판 후 약 70년 후 시점에서 금서가 된 것이다. 또한, 출판 당시만 해도 바티칸에서는 그의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1차 금서화 된 1616년은 지동설 근거가 폭발적으로 나타나던 1610년대 초반의 시기와 겹치며, 동시에 이 시기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서적이 다시금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ref>『아무도 읽지 않은 책』(오언 깅거리치, 지식의 숲, 2008) pp. 226-227</ref><ref>원래 해당 저서는 당시 거의 읽히지도 않던 서적이었다. 즉, 16세기 중후반 시점에서 가톨릭 계통이 무리하게 금서로 지정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ref>
 
또한, 프톨레마이오스가 "지구가 중심에 있다는 것은, 지구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지구는 우주적 차원에서 한 점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으로 기독교가 지구중심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지녔는지 설명하려고 하는 자들도움직임도 존재하는데, 애초에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며, 당시는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기 전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장으로 기독교가 지동설과 천동설에 대해 어떠한 교리적 입장을 지녔는지 증명하는 것은 온당한 논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황청이 지동설을 가설 차원으로 다루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현재적으로 유지되는 학설(천동설)과 비교하여 해당 학설을 더 견고화하는 용도에서의 '가설' 차원으로서 다루는 것을 허용한 것일 뿐, 이를 정설로까지 발전시킬 정도로 지원을 한다거나 학제에 편입시키겠다는 뜻은 전혀 아니었다. 반론자들은 1630년에 출판된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의 내용을 거론하면서, 마치 이 서적이 지동설에 대한 진지한 설파보다는 천동설론자를 완전히 천치로 만드는 목적 외에 쓰여지지 않았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탄압을 받은 것마냥 서술하지만, 천동설론자가 천치로 묘사되는 것과는 별개로 진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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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과학과 종교의 갈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권위에 대한 도전과 싸움이다.종교는 과학과는 달리 권위를 통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중세 스콜라철학자들로부터 그 권위의 실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그들은 성서,가톨릭 신념과 관련된 교리,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가르침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오직 그 권위로 부터 나온 강령에 따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행동하려 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일지라도 관찰과 실험에 의존하기보다 성경 복음서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으로부터 추출된 연역(演繹)과정을 거쳐야만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ref>* 『코페르니쿠스 연구: 사상의 기원과 과학사에서의 위치』(임진용, 경상대학교 대학원, 2012년) p. 127</ref>
 
마지막으로 "지동설론자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기에, 지동설은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라는 반론하는 자들도 존재하는데, 이는 마치반론은 "기독교인 과학자면 무조건 창조론자일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한 개인이 연구하는 분야와 해당 개인의 신앙을 연결시키는 논리는 부당한 논리이며, 중요한 것은 해당 학자가 특정 학문을 정말 해당 특정 학문의 논리대로 보느냐, 아니면 정치적, 신앙적 단견을 해당 학문에 적용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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