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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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국공 내전}}
[[파일:Movement KMTretreat.svg|섬네일|300px|왼쪽|국민정부가 [[타이완]]으로 후퇴하기까지 과정. ]]
[[파일:Maps of China 1912-Now.gif|섬네일|왼쪽|340px|[[중화민국]] 영토의 변천 (1912-1945)]]
[[파일:Fla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svg|섬네일|오른쪽|[[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1949년부터 [[중국 대륙]]에서 사용하였다. 오성홍기라고도 함.]]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부터 장개석이 이끄는 난징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전후의 중화민국 정부의 방향을 둘러싸고 견해 차이를 드러냈다. [[1945년]] [[11월 2일]] 중국공산당군([[중국 인민 해방군]])의 대공세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빈발했다. [[미국]]의 휴전 중재에도 불구하고, [[1946년]]에는 [[국공 내전]]이 발발한다. 당초 국민당 미국의 군사 원조를 바탕으로 공세를 벌였지만, [[소련]]의 스파이 활동 등을 통해 중국 내에서 중국 공산당에 동조하는 무리가 증가했고, 미국 정부도 대일본 지배에 열중하여 국민당에 대한 원조는 중단되었다. 그러자 소련에서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은 공산당군이 반격을 시작하여 국민정부군은 곳곳에서 대패배를 당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민정부는 [[중화민국 헌법]]을 제정([[1947년]])하여 이에 근거하여 [[장제스]] 총통을 국가 원수로 하는 헌정 정부를 수립([[1948년]])하여 중앙 정부의 정통성을 보여 주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군사적 열세를 만회할 수 없어 국민당의 내전 패배는 결정된다. 장제스는 [[1949년]] 1월 총통을 사직하고, 총통 대행을 맡은 [[리쭝런]]이 공산당과의 평화 협상을 벌였지만, 같은 해 [[4월 23일]] 수도 난징을 공산당에 점령당하였다. 이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은 국내 여러 정치 세력을 결집하여 중앙 정부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