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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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부른 예는 최치원의 글과 〈삼국사기〉에 이미 나타난다. 최치원의 글 중에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가 있고, 〈삼국사기〉에도 신라가 북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북국은 발해를 가리킨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불렀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남북국이란 용어를 단순한 방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의 체계 속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다.
 
발해는 신라와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민족 구성, 중심지의 위치, 발해 멸망 이후의 상황 등 여러 면에서 오로지 한국사에만 속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생기며,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 나라 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것을 제대로 밝혀내는 연구 성과가 있어야만, 남북국시대란 용어도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주장도 있다. <ref>{{서적 인용|url=|제목=21세기 웅진학습백과사전|성=|이름=|날짜=|총서=제 3권, '한국사'|출판사=|쪽=149 ~ 150|확인날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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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국 시대가 오기까지 ==
일반적인 발해가 건국된 지역과 그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다들 별 문제가 없지만 발해에 대한 정통성이나 문화성 그리고 그 역사관이 어느 나라의 뿌리에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특히 한반도 고대사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사료 문제도 있다. 만일 남북국시대를 인정할 경우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시기는 신라시대가 아닌 고려시대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여러가지로 문제가 복잡해진다.
 
=== 사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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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신라는 [[고구려]] 및 [[백제]], [[당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676년부터 내실을 기하기 위해 국가제도를 개혁하였고, 강화된 왕권으로 귀족들을 억눌렀다. 또한 인구 증가와 생산력 향상에 따라 조세가 늘어나자 수도를 정비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한편 30여년이 지난 후 만주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698년, [[대조영]]이 대사리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각 이끌던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규합하여,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한 뒤 진국을 건국하고, 곧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남북국사관에서 [[북국]] 발해와 [[남국]] 신라라는 200여년간의 남북국 시대가 시작됐다.
 
서기 [[900년]], 신라는 [[견훤]]이 서남부에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궁예]]가 신라의 북부에서 [[후고구려|고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남부의 신라가 분열되어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어 남북국 시대의 양상과 사실상 병존하였다. [[918년]]에 [[태봉]]의 [[고려 태조|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로 국호를 환원하고,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자 남국의 [[고려]]에서는 934년,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면서 국내에서 삼한을 일통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 명칭 ==
[[조선]] 전기에는 일부 비주류 역사관을 제외하면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를 배제한 채 발해를 한국사의 주류와 별개인 말갈족 왕조로 보고 고구려가 아닌 신라만이 '삼한일통'의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신라-고려시대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발해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에도 세조 시기에 발해의 역사를 조선사로 편입시키고 발해의 역대 왕들을 제사지내자는 상소문이 올라왔지만 조선 세조는 본래 발해는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에 속했다가 떨어져 나간 국가로 일축했다. 유희령의 16세기 초반 저작인 《표제음주동국사략》에서 발해사를 조선사의 일부로 편입했고, [[조선]] 후기 일부 실학자들이 국제하천인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발해사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북학파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하며 삼국 시대가 종결된 후 남부 신라가 있었고 북부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현재주의 관점인 '남북국사관'을 창조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부르며 발해의 존재와 그 역사적 소속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으나, [[1980년대]]부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학자들 사이에 발해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한국사에 포함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ref>{{뉴스 인용|제목=중국, 발해사 포함 고대사 송두리째 왜곡|url=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54313.html|출판사=한겨레신문|저자=박기성 특파원|날짜=[[2006년]] [[9월 5일]]|확인날짜=[[2009년]] 11월 10일}}</ref> 한국 사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중국 사학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