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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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3월 22일에 기공식이 있었고 4월 2일에 신축 공사가 시작되어 10월 12일에 지진제가 열렸다. 당시 부지의 총면적은 야산을 포함해 171,902m<sup>2</sup>, 관저의 연면적은 1,861m<sup>2</sup>이었다. 1938년에 정초식이 있었고 같은 해 6월 13일에 상량식까지 했으나 [[중일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9월 2일에 공사가 일시 중지되었다. 1939년 4월 5일에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5일에 준공되어 9월 20일에 낙성식이 있었다.<ref name="청와대">{{웹 인용|url=http://www.cwd.go.kr/kr/cheongwadae/history/history04.php|제목=청와대 역사|저자=청와대|확인날짜=2011-09-05}}{{깨진 링크|url=http://www.cwd.go.kr/kr/cheongwadae/history/history04.php }}</ref>
 
관저는 벽돌조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였다. 정면 중앙에 사각 기둥으로 지지되는 캐노피를 두었고 경사 지붕으로 처리하였으며 창문 위쪽에는 차양을 돌출시켰다.<ref name="송석기">{{웹 인용 |url=http://architecture.kunsan.ac.kr/blog/songsk/85|제목=궁궐에 들어선 근대건축물(4): 경복궁|저자=송석기|날짜=2010-04-29|확인날짜=2011-09-0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911155012/http://architecture.kunsan.ac.kr/blog/songsk/85|보존날짜=2013-09-11|깨진링크=예}}</ref> 1939년에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가 왜성대 총독 관저를 시정기념관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총독 관저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ref name="청와대"/>
 
광복 이후 총독 관저는 미군정의 최고 책임관인 군정장관 하지 중장의 관저로 사용되다가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 이승만의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탄생한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은 경무대가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면서 1960년 12월 30일에 청와대(靑瓦臺)로 개명하였다. 명칭은 건물에 ‘푸른 기와’를 덮은 데서 유래하였다.<ref>대통령 경호실, 위의 책, 63쪽.</ref> 1990년에 청와대의 본관을 신축한 이후 1993년 10월 15일에 철거하였고<ref name="경무대 철거"/> ‘청와대 구 본관 터’ 기념 표석을 세웠다.<ref>대통령 경호실, 위의 책, 78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