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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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 (1854년)|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제1차 동학군은 저절로 자진 해산하였다.
=== 1차 봉기 ===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 (1854년)|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라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한편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 일에게 군사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ref name="parkus258">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8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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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해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텐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ref name="paryoung437">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37페이지</ref>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ref name="paryoung437"/>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ref name="paryoung437"/>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ref name="paryoung437"/> 그런데 이를 [[일본군]]이 사주한 것으로 안 동학 농민군은 반발, 다시 기의를 계획한다.
=== 2차 봉기와 실패 ===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ref name="paryoung437"/>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실시하였다.<ref name="paryoung437"/>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봉기한
=== 교조 신원운동과 대원군의 개입 ===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천도교|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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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 봉기 배경 ==
[[1892년]]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고부군|고부]][[군수]] [[조병갑]]은 아버지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군민들에게 세금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ref name="parkyong448"/>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거나,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군|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ref name="parkyong448"/> 이어 [[전라북도]][[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ref name="parkyong448"/>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한다.
이에 분격한
[[파일:Chunbongjun01.jpg|섬네일|180px|right|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그는 농민 운동 당시 남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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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접 ===
남접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파일:김개남.jpg|섬네일|전주화약이후 전봉준은 호남우도, 김개남은 호남좌도를 호령하였다. 사진은 김개남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될 때의 모습]]
온건파인 무장 대접주 손화중은 같은 온건파인 [[전봉준]]에게
{{인용문2|김개남은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권고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상의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결단코 상관하지 않았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41b</ref>|전봉준|〈[[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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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접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충북 이북 지방의 파벌로 법포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의 정통 직계를 자처하는 집단으로 대도주인 [[최시형]]과 [[손병희]], [[손천민]] 등이 속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논산군]]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ref name="gul1996">양필승, 세계사 속에서 전봉준:한국민족주의의 형성과 문명사적 위기, 중앙일보 WIN, 1996년 7월호</ref>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ref name="parkus259">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9페이지</ref>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ref name="parkus259"/>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ref name="parkus259"/>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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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이 거병한 대의는 부패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다. 동학농민군의 구호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으로 유교적인 충군, 애민 사상을 담고 있었다.<ref name="kangkeun272">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7) 272페이지</ref>
[[1894년]] 가을에 이르러 동학 농민군은 항일의병적인 성격으로 변화한다. 이를 두고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그해 가을의 동학 봉기를 "[[일본군]]을 쫓아낼 목적으로 궐기한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운동이었다.<ref name="kangkeun272"/>"라고 하였다. 부패한 집권층 타도, 민씨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시작된
== 봉기 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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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자, 그 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 으로 불어났다.<ref name="parkus449"/>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동도대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ref name="parkus449"/>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지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4대 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 잡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ref name="parkus449"/>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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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봉기의 성격 ====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ref name="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ref>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 일본군의 개입 ===
동학군의 세력 형성을 경계한 [[고종]]과 왕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안경수]]는 일본, [[민영준]]은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통한 동학난의 수습에 적극 앞장섰다.<ref>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박광희 역, 다산초당, 2010) 397페이지</ref>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동비 색출'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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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제2차 봉기의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6월 9일]]([[음력 5월 6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새 내각이 친일 인사들이 있자, 일본은 외교통인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주일 조선 공사로 임명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3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음력 9월 14일]](양력 [[10월 12일]]) 삼례에서 회의를 연 결과 전봉준·김개남 등의 과격파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등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한다. 그 뒤 [[전봉준]]이 4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도했다. [[전봉준]]은 [[공주시|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
==== 공주성 진입 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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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과의 전투 ====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음력 10월 26일|26일]])까지 [[공주시|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 우금치, 공주전투, 청주전투 패전과 퇴각 ====▼
▲==== 우금치, 공주전투 패전과 퇴각 ====
[[12월 5일]]([[음력 11월 9일]]) [[전봉준]]은 드디어 총공격을 명령했다. 농민군 주력 부대가 우금치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금치는 견준산과 주미산이 만나 만든 가파른 고개로 개금티라고도 부른다. 물밀 듯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정부군과 일본군의 최신 무기가 불을 뿜었다.<ref name="parkus260">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0페이지</ref> 시간이 갈수록 농민군의 패색이 짙어갔다.<ref name="parkus260"/>
{{인용문|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ref name="parkus260"/>}}
정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는 나중에 이렇게 실토했다.<ref name="parkus260"/>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결사 항전하는 동안 농민군 일대는 공주로 향했다.<ref name="parkus260"/> 들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 농민군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ref name="parkus261"/>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거쳐 금산을 점령하고,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청주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후퇴하였다.
=== 패전과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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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와 최후 ===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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