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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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 (1854년)|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제1차 동학군은 저절로 자진 해산하였다.
=== 1차 봉기 ===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 (1854년)|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라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태인 대접주 [[김개남]], 무장(茂長) 대접주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1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로도 불리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동학농민혁명'''’이다’의 시작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 [[차치구]], 손화중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궐기한 뒤 전주성을 점령한다.
 
한편 동학군은동학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 전적|황토현]](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서 감영4월 군대를7일(양력 물리쳐5월 [[황토현11일) 전투]]에서전주감영군을 관군을격파했다. 모두이에 격파했다.크게 당시놀란 조정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동학농민군은 [[5월 27일]]([[음력 4월 23일]])(양력 5월 27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5월4월 31일27일]]()[[음력양력 4월5월 27일31일]])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 일에게 군사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ref name="parkus258">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8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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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해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텐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ref name="paryoung437">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37페이지</ref>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ref name="paryoung437"/>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고분고분 따르지 않자,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도리어 경복궁에 무단 침입, 흥선대원군 내각을 실각시키고 친일 내각을 세웠다.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의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다.<ref name="parkus258"/>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ref name="paryoung437"/> 그런데 이를 [[일본군]]이 사주한 것으로 안 동학 농민군은 반발, 다시 기의를 계획한다.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ref name="paryoung437"/> 그런데 이를 [[일본군]]이 사주한 것으로 안 동학 농민군은 반발, 다시 기의를 계획한다.
=== 2차 봉기와 실패 ===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ref name="paryoung437"/>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실시하였다.<ref name="paryoung437"/>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군이동학농민군이 외세배격을 기치글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했다.<ref name="paryoung437"/>
 
봉기한 농민군은동학농민군 제1대는 전봉준의 지휘 하에 공주성으로 다가들었다다가들었고, 제2대인 김개남의 지휘하에 청주병영으로 진격했다. 농민군의 최종 목표는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고부 봉기, 그리고 제2차 봉기까지 전봉준과 농민군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갔다.<ref name="parkus258"/>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 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ref name="paryoung437"/>
=== 교조 신원운동과 대원군의 개입 ===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천도교|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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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 봉기 배경 ==
[[1892년]]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살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이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형별을 가하였다.<ref name="parkyong448">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48페이지</ref>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고부군|고부]][[군수]] [[조병갑]]은 아버지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군민들에게 세금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ref name="parkyong448"/>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거나,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아버지이자 당시 훈장이던 전창혁은 농민들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ref name="parkyong448"/>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군|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ref name="parkyong448"/> 이어 [[전라북도]][[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ref name="parkyong448"/>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한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농민들은 한문교사훈장인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천도교|동학]]도들과교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파일:Chunbongjun01.jpg|섬네일|180px|right|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그는 농민 운동 당시 남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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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접 ===
남접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 농민군으로동학농민군으로 처음 거병한 집단이다집단을 말한다. 납접은 접주인 [[손화중전봉준]], 최고무장 지도자로 하는 파벌,대접주인 [[전봉준손화중]] 최고 지도자로태인 하는 파벌,대접주인 [[김개남]]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도자들은 현지 출신 접주들 보다는 주로 [[고창]], [[태인]], [[전주]], [[옥구]], [[금구]] 등 전라북도 북부와 서부 출신들이 많았다. [[경상북도]]의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도 남접의 세력권이었다. 남접은 본래 서포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이었다.
[[파일:김개남.jpg|섬네일|전주화약이후 전봉준은 호남우도, 김개남은 호남좌도를 호령하였다. 사진은 김개남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될 때의 모습]]
온건파인 무장 대접주 손화중은 같은 온건파인 [[전봉준]]에게 일부자신의 지역을조직을 통솔하도록 대장군직을 맡겼고, [[전봉준]]강경한 일파와는 견해나 노선이 다른혁명파인 [[김개남]] 일파는혁명을 함께 하면서도 때론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전투전주화약 후반으로이후에는 전봉준이 수록금구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우도를 호령하고, 김개남은 [[남원]] [[김개남]]대도소를 부대는두고, 전라좌도를 호령하면서 [[전봉준]] 일파와는 달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ref name="parkus261">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1페이지</ref>
 
{{인용문2|김개남은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권고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상의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결단코 상관하지 않았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41b</ref>|전봉준|〈[[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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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접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충북 이북 지방의 파벌로 법포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의 정통 직계를 자처하는 집단으로 대도주인 [[최시형]]과 [[손병희]], [[손천민]] 등이 속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논산군]]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ref name="gul1996">양필승, 세계사 속에서 전봉준:한국민족주의의 형성과 문명사적 위기, 중앙일보 WIN, 1996년 7월호</ref>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은 전봉준 역시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ref name="parkus259">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9페이지</ref>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ref name="parkus259"/>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ref name="parkus259"/>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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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이 거병한 대의는 부패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다. 동학농민군의 구호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으로 유교적인 충군, 애민 사상을 담고 있었다.<ref name="kangkeun272">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7) 272페이지</ref>
 
[[1894년]] 가을에 이르러 동학 농민군은 항일의병적인 성격으로 변화한다. 이를 두고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그해 가을의 동학 봉기를 "[[일본군]]을 쫓아낼 목적으로 궐기한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운동이었다.<ref name="kangkeun272"/>"라고 하였다. 부패한 집권층 타도, 민씨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동학농민혁명은 항일 의병전쟁, 독립운동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 봉기 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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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자, 그 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 으로 불어났다.<ref name="parkus449"/>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동도대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ref name="parkus449"/>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지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4대 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 잡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ref name="parkus449"/>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차치구(車致九)를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명의(四大名義)<ref>농민군의 강령에 해당</ref> 와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백성의 궐기를 호소했다.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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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봉기의 성격 ====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ref name="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ref>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ref name="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는 것이다.
 
=== 집강소의 설치와 활동 ===
농민군이 자발적으로 해산되고 집강소가 설치된 후 전봉준은 20여 명으로 기마대를 조직하여 전라도 내 각지를 순회하며 집강소 설치를 지도하고, 개혁 정책의 실시 상황을 점검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내에는 53군에 모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ref name="parkus450"/>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집강소의 원만한 운영을 협의하기 위해 전봉준을 전주 감영으로 초청했고, 감영 내에 대도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동학 세력의 힘을 두려워한 전라 감사는 자신의 집무소인 선화당을 대도소로 내주고, 자신은 그 곁의 작은 건물로 옮겨갔다.<ref name="parkus450"/> 그러나 집강소의 설치 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들은 집강소의 행동 강령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문제삼았다.<ref name="parkus450"/> 행동 강령 속에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상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앤다.<ref name="parkus450"/>', '또한 양반과 유림의 방자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는 내용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강소는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양반과 유교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양반 세력이 강했던 나주, 남원, 운봉의 세 곳에는 좀처럼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다.<ref name="parkus451">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51페이지</ref>
 
이에 전봉준은 마침내 무력으로 집강소를 설치할 것을 결심하고 김개남, 김봉득, 최경선 등에게 각각 3천 명의 병력으로 남원, 운봉, 나주를 접수하도록 했다. 남원과 운봉은 쉽게 함락시키고 집강소를 설치하였으나 나주의 저항은 완강하였다.<ref name="parkus451"/> 나주 관아에는 많은 동학교도들이 붙잡혀 있었고, 또한 나주 목사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최경서은 나주 입성을 감행하지 못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전봉준은 단신으로 나주 목사를 만나 그를 설득하고 동학교도들을 석방시킨 뒤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ref name="parkus451"/>
 
=== 일본군의 개입 ===
그러나 동학의 자치 행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톈진 조약 (1885년)|톈진 조약]]이 파기됨에 따라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ref name="parkus451"/> 조선조 동안의 사대주의에 불만을 품었던 개화파 정치인들은 일본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일부 개화파는 일본을 이용하여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서 빨리 개화, 변혁을 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계심을 느낀 고종은 신하들에게 직접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 청나라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진압하게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유입을 경계한 일본 역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다.
 
동학군의 세력 형성을 경계한 [[고종]]과 왕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안경수]]는 일본, [[민영준]]은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통한 동학난의 수습에 적극 앞장섰다.<ref>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박광희 역, 다산초당, 2010) 397페이지</ref>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동비 색출'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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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제2차 봉기의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6월 9일]]([[음력 5월 6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새 내각이 친일 인사들이 있자, 일본은 외교통인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주일 조선 공사로 임명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3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음력 9월 14일]](양력 [[10월 12일]]) 삼례에서 회의를 연 결과 전봉준·김개남 등의 과격파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등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한다. 그 뒤 [[전봉준]]이 4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도했다. [[전봉준]]은 [[공주시|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에게 합류할금산- 것을청주 요구했으나-서울로 거절당했다진격로를 정한다. 그동안 전봉준의 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충청도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靑山)에 집결하여 논산(論山)에 합류했다.<ref>제1차 봉기 때에는 [[최시형]]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168~179쪽. {{ISBN|89-7474-870-3}}.</ref> 그로써 김개남 대신 음력 10월에 북접의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류하여, 남접 1만과 북접 1만을 합해 총 2만여 군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 남북연합 농민군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과, 일본군 [[미나미 고시로]]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 공주성 진입 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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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과의 전투 ====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음력 10월 26일|26일]])까지 [[공주시|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은 [[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시|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ref name="parkus451"/>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ref name="parkus451"/>
 
==== 우금치, 공주전투, 청주전투 패전과 퇴각 ====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ref name="parkus451"/>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ref name="parkus451"/>
 
==== 우금치, 공주전투 패전과 퇴각 ====
[[12월 5일]]([[음력 11월 9일]]) [[전봉준]]은 드디어 총공격을 명령했다. 농민군 주력 부대가 우금치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금치는 견준산과 주미산이 만나 만든 가파른 고개로 개금티라고도 부른다. 물밀 듯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정부군과 일본군의 최신 무기가 불을 뿜었다.<ref name="parkus260">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0페이지</ref> 시간이 갈수록 농민군의 패색이 짙어갔다.<ref name="parkus260"/>
 
{{인용문|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ref name="parkus260"/>}}
 
정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는 나중에 이렇게 실토했다.<ref name="parkus260"/>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결사 항전하는 동안 농민군 일대는 공주로 향했다.<ref name="parkus260"/> 들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 농민군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ref name="parkus261"/>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거쳐 금산을 점령하고,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청주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후퇴하였다.
 
이들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 농민군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ref name="parkus261"/> 농민군은 차츰 밀리기 시작하였다.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시간을 소비했고, 또 남원의 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함에 따라 역량이 반감되어 있었다.<ref name="parkus261"/> 게다가 관군측의 전투장비는 훨씬 우수했다.<ref name="parkus261"/>
 
=== 패전과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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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와 최후 ===
다른김개남은 지도자들이12월 체포되었으나1일 [[전봉준]]태인에서 친구인 소수는임명찬의 지역에밀고로 은신하고체포되어 있었다전주로 압송된후 처형된다. 그러나 [[1894년]] [[12월 2일]] 순창에서 전봉준은 상금에 눈 먼 옛 동지의동지김경천의 배신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서울의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 후 법무아문으로 넘겨져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5차례 심문을 받았다.<ref name="parkus261"/> [[법무아문]]에서는 고문을 가하며 [[흥선대원군|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를 캤지만 그는 일절 대원군을 언급하지 않았다. 체포된 전봉준은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이렇게 밝혔다.
 
{{인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