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 (1884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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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지방의 300년 만석꾼 최현식의 장남으로 10대 시절부터 경주 최부자집을 방문한 최익현, 최시형, 신돌석, 최시형손병희 등의 영향을 받아 항일 독립 정신을 갖게 되었다. 경주 지방의 대지주(大地主)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대동청년단,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했다. 대한광복회의 1915년 12월 24일 경주 광명리 세금우편마차 습격사건에서 정보제공, 탈취자금 보관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 (1884년)|박상진]](朴尙鎭)과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를 맡기도 했다. 대한광복회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던 그는 [[3·1 운동]] 이후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거액의 자금을 송달했다.
 
그가 송달한 자금의 액수가 얼마만큼 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전재산을 개인담보로 하여 운영하던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가 1백30만엔의 부채를 지고 파산될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