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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종전 후 고향인 함흥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월북 예술인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함남 음악건설동맹 위원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을 지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활동했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초대 대의원에도 뽑혔다.
 
이면상은 [[김순남 (작곡가)|김순남]] 등 몰락한 것으로 알려진 [[남로당]] 계열의 월북 음악인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평양음악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197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을 맡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묘지는 [[애국렬사릉]]에 마련되어 있다.<ref>
{{뉴스 인용
|url=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20/20060813/20060813190300.html
|제목=북한의 열사릉, 그 상징과 폭력: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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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6-08-13
|확인날짜=2008-06-0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24114520/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20/20060813/20060813190300.html
}}</ref>
|보존날짜=2013-12-24
|깨진링크=예
}}
}}</ref>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신민요 음악으로는 [[김상희 (가수)|김상희]]가 다시 불러 널리 알려진 〈울산 큰애기〉가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빛나는 조국〉, 〈김일성 원수님 만세〉, 〈눈이 내린다〉, 〈영광의 땅 보천보〉를 비롯하여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를 다수 창작했다. [[혁명가극]]의 대표격인 《[[피바다]]》(1971) 창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가극혁명을 주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