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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래 ==
[[동양]]에서 황제는 [[진 시황제]]에게서 시작되었다. 기존 중국에서 국가원수의 호칭은 왕이었다. [[주나라]]의 [[천자]]만이 왕의 직위를 가졌고, 주변 제후들은 [[오등작]]에 따라 차등되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 천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점차 왕을 칭하는 나라가 늘어나 모든 국가들이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진]]의 시황제는 왕과 차별화되는 칭호를 원했고, [[삼황오제]]에서 각기 황과 제를 따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 <ref>《[[사기 (역사서)|사기]]》6권 진시황본기 시황 26년</ref>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제(帝)는 본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던 [[상나라]]에서 조상신을 일컫는 호칭이었으나<ref>貝塚茂樹·伊藤道治, 《中国の歴史》1권 〈原始から春秋戦国〉. 講談社, 1974</ref>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든 이후 황제의 약어로 사용되었다.
 
[[서양]]은 [[로마제국|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에서 비롯한다. 그의 칭호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lang|la|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에서 ‘[[임페라토르]]({{lang|la|Imperator}})’는 원래 개선장군이란 뜻이었으나 점차 황제를 가리키는 단어로 변용되었고 [[영어]] ‘엠퍼러({{lang|en|emperor}})’의 어원이 되었다. ‘카이사르({{lang|la|Caesar}})’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이었으나 점차 황제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독일어]] ‘[[카이저]]({{lang|de|Kaiser}})’와 [[러시아어]] ‘[[차르]]({{lang|ru|царь}})’로 변형되었다.<ref>Stephen Howe,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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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皇帝)를 칭했다. 다만 제국 선포 이전에도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종종 차용하였다. 임의적으로 황제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구려]]나 [[신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한 때가 있고 [[김춘추]]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다. [[발해]]는 각종 기록에서 독자 연호의 사용과 황상, [[황후]](皇后) 등의 용어가 나타나지만 묘호를 올리지 않고 황제라 칭하지 않았다. <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91 정혜공주묘지],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92 정효공주묘비]. 송기호, 〈용해구역 고분 발굴에서 드러난 발해국의 성격〉,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10</ref>
 
[[고려]]는 묘호를 올렸고, [[고려 태조|태조]]와 [[고려 광종|광종]] 때 약 20년 동안 독자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ref>《[[고려사]]》1권 세가 제1 태조 원년, 2권 세가 제2 광종 원년</ref>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부르고<ref>《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11년</ref>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으며<ref>《고려사》59권 지 제13 길례</ref> 임의로 황제라 부른 기록들이 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3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7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ref> 이렇듯 고려는 외부로는 중국에 칭신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했다.<ref>김기덕, 〈고려의 제왕제와 황제국체제〉, 《국사관논총》vol.78, 국사편찬위원회, 1997</ref> 다만 공식 직함은 내부적으로도 황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박재우,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584 〈고미현서원종〉(963년)],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22 〈운문사원응국사비〉(1147년)]</ref> 왕태후, 왕후, 왕태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더 많이 썼고<ref>[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limit=20&page=1&codeIds=PERIOD-0-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7%8E%8B&searchKeywordConjunction=AND 《고려사》]</ref> [[시호]]도 대왕(大王)으로 올렸다. 광종도 독자연호를 쓴 시기는 약 7년 뿐으로 [[송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며<ref>《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2년, 광종 14년</ref> 스스로도 황제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ref>〈대반야바라밀다경 사경 권수〉(952년), 이기백 편저,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 일지사, 1987</ref>
 
[[원나라]]의 [[원 간섭기|부마국]]이 된 [[충렬왕]] 이후로는 관제와 왕실의 호칭을 모두 제후국의 규격으로 격하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종(祖宗)의 묘호를 회복하고 [[왕]]과 왕비의 사후 대왕과 [[왕후]](后)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1894년]] [[청나라]]의 연호를 완전히 폐지하고, 군주를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해 불렀다.<ref>《[[조선왕조실록]]》 고종 31년 12월 17일</ref>
 
[[1897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광무 (연호)|광무]](光武)로 연호를 바꾸고 원구단에서 [[한국의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실이 부족하여 [[열강]]의 내정간섭은 심화됐고, 결국 [[1910년]] [[일본 제국]]과의 [[한일 합병]]으로 제정이 폐지된다.
 
=== 일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