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 개의 출처 구조, 0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beta14)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50번째 줄: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ref name="paryoung437"/>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다.<ref name="parkus258"/>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ref name="paryoung437"/>
 
=== 2차 봉기와 실패 ===
96번째 줄:
 
=== 남접 ===
남접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으로 처음 거병한 집단을 말한다. 납접은 접주인 [[전봉준]], 무장 대접주인 [[손화중]] 및 태인 대접주인 [[김개남]]을 최고 지도자로 나뉘어 있었다.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도자들은 현지 출신 접주들 보다는 주로 [[고창]], [[태인]], [[전주]], [[옥구]], [[금구]] 등 전라북도 북부와 서부 출신들이 많았다. [[경상북도]]의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도 남접의 세력권이었다.
[[파일:김개남.jpg|섬네일|전주화약이후 전봉준은 호남우도, 김개남은 호남좌도를 호령하였다. 사진은 김개남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될 때의 모습]]
온건파인 무장 대접주 손화중은 같은 온건파인 [[전봉준]]에게 자신의 조직을 통솔하도록 맡겼고, 강경한 혁명파인 [[김개남]]은 혁명을 함께 하면서도 때론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전주화약 이후에는 전봉준이 금구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우도를 호령하고,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좌도를 호령하면서 [전봉준] 과 달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ref name="parkus261">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1페이지</ref>
107번째 줄:
북접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충북 이북 지방의 파벌로 법포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의 정통 직계를 자처하는 집단으로 대도주인 [[최시형]]과 [[손병희]], [[손천민]] 등이 속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논산군]]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ref name="gul1996">양필승, 세계사 속에서 전봉준:한국민족주의의 형성과 문명사적 위기, 중앙일보 WIN, 1996년 7월호</ref>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ref name="parkus259">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9페이지</ref>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ref name="parkus259"/>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ref name="parkus259"/>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226번째 줄:
 
==== 제2차 봉기의 성격 ====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ref name="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ref>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ref name="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는 것이다.
 
=== 일본군의 개입 ===
297번째 줄:
 
==== 일본군과의 전투 ====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음력 10월 26일|26일]])까지 [[공주시|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시|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ref name="parkus451"/>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ref name="parkus451"/>
 
==== 우금치, 공주전투, 청주전투 패전과 퇴각 ====
306번째 줄:
정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는 나중에 이렇게 실토했다.<ref name="parkus260"/>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결사 항전하는 동안 농민군 일대는 공주로 향했다.<ref name="parkus260"/> 들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 농민군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ref name="parkus261"/>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거쳐 금산을 점령하고,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청주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후퇴하였다.
 
 
438번째 줄:
[[파일:Seongbin Park.jpg|섬네일|130px|박성빈, 동학농민군의 고령, 성주지역 접주였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헌부]]감찰인 [[윤치소]](尹致昭)는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ref>동학농민운동 토벌군</ref> 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그는 일제하 대지주이자 사업가로서 친일로 변신, 해평 윤씨 일족인 윤웅렬, 사촌인 윤치호 등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ref name="ReferenceA">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268페이지</ref> [[윤치소]]는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윤원선]]의 아버지였다. 한편 동학농민군 고령, 성주 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다 체포, 사형을 모면한 [[박성빈]]은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 [[박정희]]의 아버지이자 총리 [[김종필]]의 처조부가 된다.
 
[[1894년]] [[10월]] 토포사 [[윤영렬]]은 아산(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의 토벌에 참여한다. [[윤영렬]]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중양]]과 함께 토벌군에 별군관으로 차출되었다.<ref name="ReferenceA"/> 별군관으로 차출된 그는 관군 외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관군과 의병 병력을 이끌고 [[충청남도]] [[아산군|아산]]과 [[천안군|천안]] 일대의 동학 농민군토벌에 참여하였다. [[윤영렬]]은 [[윤보선]] [[대통령]]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상하이]]에 망명중이던 [[윤치호]]는 동학 농민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