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53번째 줄:
(※ 서울국제가요제는 78~81년까지는 대회 본선을 치르기 전에 국내가수들을 대상으로 본선 출전자를 뽑기 위한 예선을 따로 치렀는데 1980년 국제가요제 국내예선에서 장덕 작사/작곡 최병걸이 노래한 "사랑은 떠나도"는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본선대회 출전자만 음반에 기록이 남아 있어서 기록을 찾을수 없는 것입니다. 국내예선에는 최병걸을 비롯한 13개팀이 참가해서 3개팀(혜은이, 와일드캣츠, 진미령)이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한편 대회 참가곡 "사랑은 떠나도"는 이듬해인 1981년 최병걸의 개인 독집앨범에 실렸습니다.)
 
또한 1981년 TBC 동양방송이 주최하던 세계가요제가 언론통폐합으로 KBS 주최로 열리게 되는데 이때 "연안부두"로 유명한 김트리오의 막내 "김선"이 "사랑은 영원히"로 본선에 오르게 된다. 장덕은 작사를, 김트리오의 "김파"는 작곡을 했다. 6월 그녀는 타이틀곡 <순정>을 비롯 <진실한 사랑이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 등 신곡 5곡과 현이와 덕이 정규 1집, 그리고 그녀의 첫 컴필레이션 음반 《[[첫사랑 (장덕의 음반)|첫사랑]]》의 수록곡들 중 몇 곡을 골라 그대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 《순정》을 발표한다. 10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한국식품점에 갔다가 우연히 1년이 지난 1979년 9월 9일자 [[선데이서울]] 주간지를 통해 장덕의 자살 소송 기사를 접하게 되고 충격을 받아 장덕을 간곡히 불렀다. 장덕은 어머니의 부름에 계속해서 응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새어머니가 장덕을 짝사랑 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과의 선자리를 주선하여 그녀를 그와 결혼시키려 하자 어린 나이에 겁을 먹고 도망치듯 한국을 빠져나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 테네시 주의 내쉬빌로 들어가게 된다. 1980년 10월이었다.
 
[[내쉬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어머니는 오빠 장현 또한 불러서 대학 공부를 시키려 했지만 설득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내쉬빌 한인회가 주최하는 송년파티가 있었다. 장덕과 어머니도 참석했는데, 한인회 회장이 찾아와서 한인사회에 딱 하나 있는 밴드가 실력이 부족해서 곤경에 처해있다며 그들을 도와달라고 장덕에게 부탁한다. 그 밴드의 이름은 '리 패밀리'로 실제 형제들이 조직하여 만든 가족밴드였다. 장덕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머니가 금년만 해 보라고 해서 결국은 승낙한다.
70번째 줄:
 
=== 1983-85 : 이혼과 귀국, 솔로로서의 재기와 슬럼프 ===
1983년 10월 이혼을 하게 된 장덕은 가수 생활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 · 오빠 · 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메모 한장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 한남동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다. <ref>[http://www.mbn.co.kr/pages/vod/programContents.php?progCode=613&menuCode=3439 아궁이 65회 - 파란만장 가족사] "MBN 2014년 7월 11일 방송 참조"</ref> 한 달 뒤(11월) 그녀는 어렵게 서라벌레코드와 3년간 1000만원이라는 금액에 전속계약을 맺고(그녀는 오랫동안 공백을 가진 스타였기 때문에 좋은 조건으로는 계약이 쉽지 않았다.) 타이틀곡 <날 찾지 말아요>를 비롯 <안녕히 계세요>, <가을에 만난 소녀>, <철없는 안녕>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1집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한다. 당시 장덕 본인이 방송 출연을 꺼려한 탓에 방송을 가장 많이 탄 가수 부문에서는 순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앨범이 발표된 지 6달 만에 타이틀 곡 <날 찾지 말아요>가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에서 집계한 '한 달(1984년 5월)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문 3위까지 오른다. 많은 방송활동을 하지 않는 장덕으로서는 좋은 결과였다. 이 사이 장덕은 새 음반을 내는 자매 듀엣 국보자매에게 <백치미>, <사랑하고 있나봐요>를 작사/작곡해 주기도 했다. 국보자매는 현이와 덕이, 그리고 장덕에 의해 각각 발표된 바 있는 <끝없는 마음이야>, <첫사랑>까지 리메이크 하여 1984년 2월에 발매된 자신들의 새 음반에 수록했다.
 
1984년 10월 장덕은 [[이미례]] [[감독]], [[김진아]] · [[남궁원]] [[주연]]의 개봉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11월에는 타이틀곡 <[[사랑하지 않을래]]>를 비롯 <사랑의 꿈>, <사랑과 인생>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을 발표한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조용한 편이었다. 이에 장덕은 실망한다. 어린 시절 뭣 모르고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렀던 그 때와 한 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성인이 되어 복귀, 겪게 되는 지금의 연예계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점 또한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장덕은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우울히 보냈고 식음을 전폐하며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신음하게 된다. 방송국에서 출연 섭외 전화가 와도 "장덕이 없어요" 한 마디만 던지고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동생의 이런 안타까운 소식에 현이와 거룩한 성의 리더이자 보컬로서 활동하고 있던 오빠 [[장현]]이 1985년 4월 울산에서 서울로 상경, 장덕에게 현이와 덕이의 재결성을 제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