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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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3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술라는 귀족파를 규합하였다. 메텔루스 피우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Pius)와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등이 술라를 지지했다.<ref>폼페이우스는 기원전 89년 콘술인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아들로 후일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삼두동맹을 맺는다. 폼페이우스는 내전 당시 술라를 도와 큰 공적을 세웠으나 술라 사후 그가 만들어놓은 체제를 가장 많이 파괴한다.</ref> 당시 집정관은 노르바누스(Gaius Norbanus)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Publius Cornelius Scipio Asiaticus)였다.<ref> 노르바누스는 아라우시오 전투의 패장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를 탄핵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고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누스의 형제인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자손이고 사투르니누스의 강경한 반대파로 그를 몰락시켰다.</ref> 노르바누스와 소 마리우스가 술라를 급습했으나 오히려 술라에게 대패하며 6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술라와 교섭을 하던 중에 병사들이 그를 버리고 술라에게 항복했다. 스키피오는 술라에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기원전 82년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와 소 마리우스(Gaius Marius)가 집정관이 되었는데 카르보는 기원전 85년과 84년에 킨나와 집정관을 지낸적이 있는 2선 집정관이었다. (기원전 82년 당시는 3선 집정관이다.) <ref>카르보는 마리우스가 로마에서 도주할 때 동행했으며 킨나 사후, 포풀라레스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소 마리우스는 마리우스의 아들로 당시 28세 였다.</ref> 프라이네스테(Praeneste)에서 소 마리우스는 술라의 병사들이 오랜원정에 지쳐있음을 알고 그들을 급습했지만 800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패주했다. <ref>플루타르코스, "술라"</ref> 이 소식을 들은 카르보는 메텔루스 공격을 멈추고 철수했으나 폼페이우스의 기습공격으로 큰 손실을 봤다. 술라의 적인 카리나스는 여러차례 술라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그때마다 도망쳐 살아남았다.
 
이후 술라는 카르보가 출동시킨 군대를 모조리 무찔렀고 , 메텔루스 역시 파벤티아(Faventia)에서 카르보의 공격을 막아내고 10000명을 척살하였다. <ref>아피아노스, 「로마 내전사」. 당시 카르보는 야음을 틈타 기습했으나 어두움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카르보 진영의 노르바누스는 이 전투 이후 외국으로 망명하였다.</ref> 폼페이우스는 클루시움(Clusium)에서 카르보군을 2만명이나 죽였다. 한편, 삼니테스족의 폰티우스 텔레시누스(Pontius Telesinus)는 로마로 진격하였고 술라는 소 마리우스에 대한 포위를 멈추고 콜리네(Coline) 성문에서 텔레시누스와 크게 싸웠다.
 
[[기원전 82년]] 11월 1일 콜리네 문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술라의 우익은 크게 적군을 격파하였으나 술라 자신이 이끄는 좌익은 적군의 우익과 두 군대가 괴멸되기 전 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이 전투 도중에 술라는 적진에서 날아오는 창을 고개를 숙여 피해 전장에서의 죽음을 면했다. 결국 적의 좌익을 섬멸한 술라가 승리하였고, 로마에는 다시 술라의 정권이 세워졌다. <ref>플루타르코스, "술라"</ref> 전투 후 소 마리우스와 텔레시누스는 동반 자살했고, 다른 집정관 카르보는 시칠리아로 달아나다 후에 폼페이우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콜리네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로마로 입성한 술라는 대대적이고 철저한 반대파 학살에 착수했다. 우선 삼니테스족 패잔병 8000명을 원로원에서 회의하는 도중에 병사들을 시켜 학살했다.<ref>아피아노스, 「로마 내전사」</ref> 술라는 1만명의 노예를 해방시켜 자신의 씨족명 '코르넬리우스'를 하사하여 정적소탕의 행동대로 삼았다. 또한 살생부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적을 숙청했다. 그 살생부에 오른 인물은 모두 4천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숙적 마리우스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그 시신은 부관참시되었고, 전년도 집정관이자 소 마리우스와 함께 술라를 공격한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도 제거되었다.(스키피오는 술라를 피해 도망가다 병사했다.) 이때의 살생부에는 18세의 킨나의 사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도 있었으나 카이사르는 학살을 면하고 도망쳤다. 한편 술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고 그의 안에는 수백명의 마리우스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ref>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훗날 독재관이 되어 술라가 한 것의 정반대의 개혁을 한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