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정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20번째 줄:
 
== 역사 ==
동래 정씨의 시조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으로 전해지고 있다.<!-- 1959년 동래정씨호음공파보 이후 간행된 많은 파보에서 정회문공은 경주정씨 병부상서 鄭琓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호음공파보에 실린 "동국정씨원류상세기"라는 엉터리 고증에 의한 것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
 
그러나 선계에 대한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의 후손으로 고려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한다. 2세는 안일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이다.<ref>고증자료1: 1928년 발현한 복야공 정목의 묘지</ref><ref>고증자료 2: 1655년 을미보 간행 이전에 발현한 문안공 정항의 묘지;화지산 묘갈명에 정문도공을 시조라고 표현한 것은 문안공의 지석이 발현하기 전 정문도공을 앞서는 선조를 몰랐기 때문에 한동안 정문도공을 시조로 받들어 오던 흔적임</ref> 정문도의 장자 정목(鄭穆)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정목(鄭穆)의 아들 4형제 정제(鄭濟)ㆍ정점(鄭漸)ㆍ정택(鄭澤)ㆍ정항(鄭沆)이 문과(文科)에 급제하면서 세거지(世居地)인 동래를 관향으로 삼았다.
26번째 줄:
동래정씨는 대대로 호장이었으나 3세(三世)인 [[정목]](鄭穆)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정목(鄭穆)의 아들로 그의 네 아들인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면서 명족(名族)이 되었다. 정선조(鄭先祚)의 후손은 계속 동래(東萊)에 남아 향리직(鄕吏職)에 종사하였다.
 
동래 정씨(東萊 鄭氏)는 조선시대 왕손인 전주이씨(22명), 세도정치를 펼친 안동김씨(19명)에 이러 세 번째로 많은 정승(17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 외에도 대제학(大提學) 12명, 호당(湖堂) 10명, 공신(功臣) 6명, 상신(相臣) 17명, 판서(判書) 20여명과 [[종묘]] 배향인물 3명에 조선조(朝鮮朝) 문과(文科) 급제자만 198명을 배출하였다.
 
== 인물 ==
64번째 줄:
** 참판공개보파(參判公 介保: 13세)
* 첨사공필파(詹事公 弼: 6세)
** 호군공회종파(護軍公 會宗: 13세) <ref>인터넷상에서 떠도는 동래정씨 소개에 관한 글 중에서 호군공회종파와 윤창파의 서차를 바꾼 것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 잘못된 정보의 출처는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성씨의 고향>>이라는 책이다. 동래정씨 6세 첨사공 필의 손자대인 8세에서 원, 태, 위, 연, 숭 5형제가 계셨고 호군공회종파는 둘째 泰의 후손이고 윤창파는 셋째 謂의 아들인 윤창의 후손이다. (1716년 족보에 윤창의 아들 4형제가 모두 자손무전이었는데 윤창파는 1919년 족보에 고증없이 입록되었음.)</ref>
** 윤창파(允昌派: 9세)=동지공진파(同知公軫派: 12세)
** 수찬공옹파(修撰公 雍: 13세)
92번째 줄: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일원
* 대구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 박곡리
* 대구 달서구 이곡동
* 경북 경산시 정평동
* 경북 청도군 화양읍 삼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