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치 겐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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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내력과 조선에서의 활동 ==
[[구마모토 번]]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삿사 도모후사 <ref>일본의 교육자·정치인·언론인으로, 구마모토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 단체 국권당의 수령. 조선에서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서 미우라 공사를 배후 조종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다.</ref>(佐々友房, 1854년 ~ 1906년)가 [[구마모토현]]에 설립한 학교 "済々黌" (지금의 "熊本県立済々黌高等学校") 에서 교육 받았다.
 
== 을미사변 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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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정계에서의 활동 ==
아다치는 구마모토로 돌아온 후, 삿사 도모후사와 함께 구마모토 국권당 (熊本国権党) 을 결성하였다. 1902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첫 당선되었으며, 이후 줄곧 당선돼 14선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1914년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총선거에서 여당 입헌동지회 (立憲同志会, 후의 [[민정당]] (民政党) 의 선거장을 맡아 대승을 거두었고, [[도쿠토미 소호]] (徳富蘇峰) <ref>일본의 언론인·역사학자·비평가·정치인으로,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분류되어 자택에 칩거하였다.</ref> 로부터 선거의 신이라는 평을 받았다.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체신대신, [[하마구치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했으며, 강경파로서 군부에 동조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정우회 (政友会) 와의 협력 내각 성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와카쓰키 내각 총사직 후 민정당을 떠나, 1932년 우익 정치인 [[나카노 세이고]] (中野正剛) 와 함께 국민 동맹 (国民同盟) 을 결성하였으며, 1940년 이후에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이끄는 [[대정익찬회]] (大政翼賛会) 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