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놀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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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놀은 여전히 새 정부에도 문제로 남아있었다. [[1822년]] 초, 플로리다 영토에 파견된 임시 장관이자 세미놀에 대한 대리인이었던 존 R 벨 대위는 플로리다에 있는 수많은 인디언에 대한 추정치를 준비하였다. 그는 약 22,000명의 인디언과 그들이 소유한 5,000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그들 중 2/3가 크릭 전쟁에서 피난민이라고 추측했고, (그들의 관점에서는) 플로리다에 대한 유효한 요구권이 없다고 추정했다. 인디언 정착촌은 애팔래치콜라 강과 스와니 강을 따라 주변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거기에서 남동쪽 방면에는 아라추아 대평원이 있으며, 남서 방향은 탬파베이의 북쪽에 약간 걸쳐 있었다.<ref>Missall. P. 55.</ref>
 
플로리다의 관리들은 세미놀 족들과 닥쳐올 상황에 대한 우려를 했다. 보호구역의 설정을 담은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인디언은 작물을 심을 곳을 확정짓기 못했기 때문에 추수를 기대할 수 있는 작물을 심을 수 없었고, 미국이 점령한 땅에 이주해 올 불법 백인 입주민들과 경쟁해야 했다. 교역을 허용하는 제도가 전혀 없었고, 무면허 상인들이 세미놀에 주류를 공급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 관리들의 지위는 임시직이거나 잦은 보직 변경이 있었기 때문에 세미놀과 대화는 취소되거나, 연기되거나, 아니면 그냥 새로운 회담을 갖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정하기 위해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ref>Missall. Pp. 58-62.</ref>
 
=== 모울트리 크리크 협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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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과 일부 분쟁도 있었지만, 세미놀들은 천천히 보호구역에 정착했다. 현재 오칼라에 위치한 킹 요새가 보호구역 근처에 건설되었고, [[1827년]] 상반기 경 육군은 세미놀이 보호구역에 정착하여 플로리다가 평화롭게 되었다고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평화는 5년간 유지되었다. 그동안 세미놀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반복되었다. 세미놀은 특히 크릭 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암시하는 그런 움직임에 반대했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세미놀을 단순히 최근 플로리다로 이주한 크리크 족이라고 여겼지만, 크릭 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ref>Missall. Pp. 75-76.</ref>
 
탈주 노예의 지위는 세미놀과 백인 사이에 뜨거운 감자였다. 세미놀과 노예주는 노예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을 계속 했다. 플로리다의 개간된 새 농장은 탈출해 온 노예들의 인구를 증가시켰다. 인디언의 폭동과 노예들의 반란 가능성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듀발 지사는 추가로 연방 정부군을 플로리다에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대신, 킹 요새는 [[1828년]]에 폐쇄되었다. 보호구역으로 와서 식량 부족 사태에 시달리면서 더 가난해진 세미놀은 식량을 찾아 계속 방랑을 하게 되었다. [[1828년]], 세미놀의 오랜 숙적인 [[앤드루 잭슨]]이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830년]], 의회는 《[[인디언 이주법]]》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미국은 세미놀에 대한 모든 문제를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동시켜 해결하고자 했다. <ref>Missall. Pp. 78-80.</ref>
 
=== 패인즈 랜딩 협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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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1월, 전쟁에 변화가 있었다. 다양한 작전을 통해 많은 세미놀, 블랙 세미놀이 죽거나 잡혔다. 1월 말, 몇 명의 세미놀 추장이 제섭에게 사신을 보내 정전을 제의했다. 3월, 미카노피를 포함한 일부 추장에 합의로 항복 협정이 서명되었다. 세미놀이 서부로 이주할 때 동료와 그들의 흑인 노예, 재산을 가져갈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5월 말까지, 미카노피를 비롯한 많은 추장이 항복했다. 그러나 2명의 중요한 지도자, [[오세올라]]와 샘 존스는 항복을 거부하고 격렬하게 이주를 반대했다. [[6월 2일]], 그들 2명의 지도자는 약 200명의 추종자와 함께 방비가 느슨한 브룩 요새의 전쟁포로 수용소에 침입하여 항복한 700명의 세미놀 포로들을 탈출시켰다. 전쟁이 재개되었고, 제섭은 다시는 인디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제섭의 명령으로, 코아쿠체 (와일드), 오세올라 및 미카노피를 포함한 몇 명의 인디언 수장들이 휴전 회의에 출두했을 때 잡혔다. 코아쿠체와 존 호스를 포함한 많은 포로들이 [[세인트 오거스틴]]에 있는 마리온 요새에서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출을 했지만, 오세올라는 그들과 함께 도망가지 못했다. 그는 감방에서 [[말라리아]]로 추측되는 질병으로 사망했다.<ref>Missall. Pp. 126-134, 140-141.</ref>
 
제섭 장군은 반도를 아래로 급습하는 종대를 조직화하여, 세미놀을 남쪽으로 밀어냈다. [[1837년]] 크리스마스에 재커리 테일러 대령의 800명의 종대는 오키초비 호수의 북쪽 기슭에서 약 400명의 세미놀 유목민 무리를 발견했다. 샘 존스, 앨리게이터, 그리고 최근에 도망온 코아쿠체가 이끄는 세미놀은 억새풀에 둘러싸인 요충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테일러 군이 접근하자 세미놀은 결국 요충지에서 쫓겨나 호수를 건너 달아났다. 그러나 테일러 군은 26명이 사망하고, 112명이 부상을 당했다. 반면 세미놀 피해자는 사망자 11명과 14명의 부상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키초비 호수 전투》(Battle of Lake Okeechobee)는 테일러와 그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ref>Mahon. P. 228.</ref> <ref>Missall. Pp. 138-139, 142-143.</ref>
 
1월 말, 제섭 장군의 군대는 오키초비 호수의 동쪽까지 세미놀 대부대를 추격했다. 세미놀은 당초 요충지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포격으로 인해 넓은 개울 너머로 퇴각하고, 그곳에서 다른 포진을 짰다. 결국 세미놀은 퇴각했고, 록사해치 전투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끝났다. [[1838년]] 2월, 세미놀 수장인 터스케기와 홀렉 하죠는 오키초비 호수 남쪽에 머물게 해준다면 정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제안을 가지고 제섭 장군에게 접근했다. 제섭 장군은 그 제안을 지지했지만, 승인을 위해 연방 정부 문서를 써야했다. 세미놀 수장과 추종자들은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군 근처에 진을 쳤다. 연방 육군 장관이 그 제안을 거절하자 제섭 장군은 주둔지에서 500명의 인디언을 붙잡아 그들을 서쪽으로 송환했다.<ref>Missall. Pp. 144-147, 151.</ref>
 
5월, 지휘의 완화를 요구했던 제섭 장군의 요청이 승인되었고, 재커리 테일러는 플로리다의 육군 사령관을 맡았다. 줄어든 플로리다의 병력과 함께 테일러는 북부 플로리다 전역에, 30km (20마일) 간격으로 많은 소규모 검문소를 만들어 북부 플로리다로 세미놀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집중했다. 그 겨울은 매우 조용했다. 충돌과 분쟁이 계속되었지만, 중요한 작전은 없었다. 워싱턴과 미국 전역에서 전쟁 지원이 줄어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미놀이 플로리다에 있을 권리를 얻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다. [[마틴 밴 뷰렌]] 대통령은 세미놀과 새로운 협상을 위해 육군 총사령관 알렉산더 매콤을 파견했다. 1839년 5월 19일, 매콤은 세미놀과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세미놀은 남부 플로리다에 보호구역을 마련해 주는 대가로 휴전을 하기로 합의했다. <ref>Missall. Pp. 152, 157-164.</ref>
 
[[1839년]] 여름이 지날 무렵 협정이 수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7월 23일]] 약 150명의 인디언이 윌리엄 하니 대령 휘하의 23명의 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던 칼루사해치 강(Caloosahatchee River)의 교역소를 공격했다. 하니 대령을 포함한 몇 명의 병사가 강에 도달하여, 도주하는 배를 찾아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병사는 교역장에서 여러 명의 민간인과 함께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공격을 차카이카가 이끄는 "스페인" 인디언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실제로 매콤과 합의를 했던 미카즈키 갱을 이끄는 샘 존스를 의심했다. 샘 존스는 33일 후에, 이 공격의 책임자를 하니에게 인도할 것을 약속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샘 존스의 주둔지를 방문한 두 명의 병사가 살해당했다.<ref>Missall. Pp. 165-16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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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5월, 아미스테드를 대신해 플로리다의 육군 지휘관이 윌리엄 젠킨스 워스 대령이 임명되었다. 연방의회에서도 이 전쟁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워스는 예산을 줄여야만 했다. 육군은 약 1,000명의 민병대를 해고했고, 소부대 사령관은 통합되었다. 여름에 워스는 "정찰과 파괴"라는 임무를 그의 병사들에게 명령했고, 그것은 사실상 플로리다 북부에 남아 있던 나머지 세미놀을 쫓아냈다.<ref>Knetsch. Pp. 128-131. Mahon. P. 298.</ref>
[[파일:1842seminolereservation.png|섬네일|300px|1842년 제2차 세미놀 전쟁의 말기에 플로리다 남서부에 비공식 인디언 보호구역]]
육군에 의한 지속적인 압력은 효과를 거두었다. 배고픔을 피해 항복하는 세미놀들도 나왔다. 나머지 사람들은 항복을 위해 협상하러 나왔을 때 잡혔는데, 그들 중에는 코아쿠체도 포함되어 있다. 많은 뇌물은 코아쿠체가 다른 이들을 항복하도록 협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ref>Mahon. Pp. 298-300.</ref><ref>Covington. Pp. 103-6.</ref>
 
[[1842년]]초 워스 대령이 남아 있는 세미놀은 평화롭게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권한 후 그는 종전을 선언하기 위해<ref>Covington. Pp. 107-7.</ref> 남아있는 세미놀을 플로리다 남서부 비공식 보호구역에 남겨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842년]] [[8월 14일]] 마침내 종전 선언을 했다. 같은 달, 의회는 무력 점령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 법안에는 토지를 개간하는 정착민에게 무상으로 땅을 주고, 그들이 인디언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842년 말에는 플로리다 남서부의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나머지 인디언을 모아 서쪽으로 보냈다. [[1843년]] 4월경에 플로리다에서 군대는 1개 연대 수준으로 감소했다. 1843년 11월 경에 워스는 플로리다에 남아있는 유일한 인디언은 보호구역에서 생활하는 약 95명의 남성과 약 200명의 여성과 어린이이며, 그들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ref>Mahon. Pp. 313-4, 316-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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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격 소식이 탬파에 알려지자 도시민들은 민병대장을 선출하여 중대를 조직했다. 새로 구성된 민병대는 피스 강 유역을 행진하면서 더 많은 병사를 모집했고, 강을 따라 여러 요새에 배치되었다. 제임스 브룸(James E. Broome) 지사는 가능한 한 많은 지원병 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주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지원병을 모집하려 했다. 제퍼슨 데이비스 육군 장관은 2개의 보병 중대를 받아들여, 약 260명의 병사에, 3개의 기마 중대를 구성했다. 브룸 지사는 주의 관리 하에 400명의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였다. 모두 육군이 편성하여 주의 통제 하에 있는 주 방위군은 일부 무장이 되었고, 부분적으로 개인의 기부에 의한 보급이 이루어졌다. 블룸 주지사에 의해 제시 카터 장군이 주의 군대를 이끄는 "계급없는 특수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카터가 작물을 수확하는데 절반의 군대를 동원했기 때문에 순찰을 할 수 있는 병력은 200명밖에 없었다. 탬파의 한 신문은 기마 순찰대는 말을 타고 넓은 평야를 순찰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런 순찰로 인해 세미놀들은 순찰대의 접근을 쉽게 알아차렸다.<ref>Covington. Pp. 129-30.</ref>
 
1856년 1월 6일, 마이애미 강의 남쪽에서 풀을 모으던 두 명의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 지역의 정착민들은 급히 댈라스 요새와 키 비스케인(Key Biscayne)으로 대피하였다. 오센 투스테누기가 이끄는 한 무리의 세미놀들이 디나우도 요새 밖에서 나무를 벌채하던 순찰대를 공격하여 여섯 명 중 다섯 명을 죽였다. 그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민병대를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미놀은 탬파베이의 남쪽 해안을 따라서 기습을 가했다. 그들은 지금의 사라소타에서 한 명의 병사를 죽이고, 집을 불태웠고, 1856년 3월 31일에는 지금의 브래든튼(Bradenton, Florida)에 있는 요셉 브레든 박사의 농장 주택인 "브레든 캐슬"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들에게 그 캐슬은 벅찼지만, 7명의 노예와 세 마리의 노새를 끌고갔다. 포로와 전리품으로 인해 그들은 빨리 이동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빅찰리 아포카 크리크에서 들러서 그곳에서 찾은 쇠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가, 추적해온 민병대가 따라잡혔다. 민병대는 두 명의 세미놀을 죽이고, 브레든 박사의 농장에서 끌고간 노예와 노새를 다시 회수했다. 사망한 세미놀의 머리가죽을 벗겨 하나는 탬파에 다른 하나는 마나티에 전시해 두었다. <ref>Covington. Pp. 130-132.</ref>
 
4월동안 상비군과 민병대는 보호구역 곳곳을 순찰했지만, 세미놀과 접촉은 거의 없었다. 4월, 보우렉스 타운 근처에서 6시간에 걸친 전투가 발생하여 4명의 군인이 죽고, 3명이 부상당했다. 세미놀은 주의 곳곳에서 소규모의 습격을 계속했다. 1856년 5월 14일, 15명의 세미놀이 탬파의 북쪽 로버트 브래들리 대위의 농장에 있는 농가를 공격하여 어린 아이 두명을 살해했다. 제2차 세미놀 전쟁 때, 브래들리가 타이거 테일의 형제를 죽였기 때문에, 브레들리는 세미놀에게 보복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였다. 5월 17일, 세미놀은 플로리다 중부에서 군용 마차를 공격하여, 3명의 병사를 죽였다. 군대가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 때까지 탬파로 오가는 역마차 우편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ref>Covington. Pp. 132-133.</ref>
 
[[1856년]] [[6월 14일]], 세미놀은 미드 요새에서 3km 떨어진 농장을 공격했다. 모든 가구가 집안으로 들어가 안전하게 피신했기 때문에, 그들은 세미놀을 만에 잡아둘 수 있었다. 미드 요새에서 총성이 들리자, 7명의 기마 민병대가 응사를 했다. 3명의 민병대가 죽고 다른 2명은 부상을 당했다. 많은 민병대들이 세미놀들을 추적했지만, 갑자기 비가 내려 화약이 젖었기 때문에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16일]] 프레이저 요새에 있는 20명의 민병대가 피스 강을 따라 한 무리의 세미놀을 불시에 기습하여 몇 명의 세미놀들을 사살했다. 일방적인 습격임에도 불구하고, 민병대는 2명의 사망자와 3명의 부상자를 낸 후 철수했다. 그들은 20명 이상의 세미놀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나, 인디언은 4명의 사망자와 2명의 부상자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망자 중에는 오센 투스테누기가 있었고, 그는 정착촌에 대한 공격을 활발하게 이끈 유일한 추장이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ref>Covington. Pp. 133-134.</ref>
 
플로리다의 시민은 민병대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민병대가 하루 또는 이틀간 순찰을 하는 체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농장에 일하러 집으로 갔고, 태만, 음주 및 절도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다. 관리는 필요한 문서를 마지못해 제출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민병대가 정착민에 대한 공격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ref>Covington. Pp. 134-13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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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9월, 윌리엄 S. 하니 준장이 연방군의 지휘관으로 플로리다에 돌아왔다. 그는 제2차 세미놀 전쟁에서 교훈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로리다 전체에 거려 일렬로 요새 체계를 갖추고, 순찰은 세미놀 영토 깊숙이 이뤄졌다. 그는 세미놀을 빅 싸이프레스 스웜프와 에버글레이즈로 몰아넣을 계획을 세웠는데, 우기에는 그곳에 살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마른 땅을 찾아 인디언들이 홍수진 곳을 피해 갈 때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니 계획 중 일부는 습지에서 홍수진 섬과 마른 섬 간의 이동을 위해 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세미놀과 협상을 시도를 했지만, 그들과 접촉할 수 없었다. [[1857년]] 1월 초순, 하니는 인디언을 적극적으로 추적하라고 군에 명령했다. 그러나 하니 계획은 캔자스 주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과 제5보병 부대가 캔자스로 이동했기 때문에 성과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ref>Covington. Pp. 135-6.</ref>
 
가스타우스 루미스 대령은 플로리다에서 하니 장군의 후임 사령관이 되었지만, 제5보병대가 철수하고, 제4포병대와 10개의 중대만을 남았다. (제4포병대는 이후 4개의 중대로 줄어들었다.) 루미스는 보트 중대에 지원병을 편성하고, 특히 빅 사이프레스 스웜프와 에버글레이즈에서 사용하기 위해 건조한 금속제 "앨리게이터 보트"를 이 중대에 지급했다. 이 보트는 길이 9m로 최대 16명의 병력을 습지로 실어나르는 것이 가능했다. 이 보트 중대는 주로 여성과 아이들과 같은 많은 인디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상비군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애버너 더블데이 대위를 포함한 일부 장교들은 세미놀이 육군 정찰을 쉽게 피한다는 것을 관측했다. 더블데이는 입대한 사병의 대부분이 숲 정찰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ref>Covington. Pp. 135-40.</ref>
 
[[1857년]], 플로리다 민병대 10개 중대가 연방군에 편입되어, 9월까지 총 800명의 병력이 되었다. 11월, 이 부대는 빌리 보우렉스 무리에 있던 18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부대는 여러 마을과 경작지를 발견하여 파괴했다. 1858년 설날에 빅 싸이프레스 스웜프로 이동하여, 그곳에 발견한 마을과 경작지를 파괴했다. 인디언 준주에서 온 다른 대표단이 1월 플로리다에 도착하여 보우렉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 동안 군대는 철수했다. 전년에 결국 세미놀들은 인디언 준주에서 크리크 족과 별도의 자신만의 보호구역을 받을 수 있었다. 각 전사에게 $500를 지급하고(추장은 그 이상), 여자들에게는 $100 현금 지급을 약속했다. 3월 15일, 보우렉스과 아신워의 무리는 제안을 받아들여 서부로 가기로 동의했다. [[5월 4일]] 총 163명의 세미놀(이전에 잡힌 포로들을 포함하여)은 배를 타고 뉴올리언스로 보내졌다. [[1858년]] [[5월 8일]], 루미스 대령은 종전을 선언했다.<ref>Covington. Pp. 140-14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