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의 문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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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 연맹체적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삼국의 문화는 현존하는 것이 적어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삼국 시대]]인은 원시 사회의 유풍을 일면 답습하면서도 그들의 생활 모습을 차츰 달리해 간 것 같다. 삼국 초의 문화에서는 시조신(始祖神)에 대한 제사 의식이 행해졌으며, 또한 [[제천 의식]]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어 갔던 것 같다.
 
삼국이 정립(鼎立)되어 가기 훨씬 이전에 벌써 그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노래가 나타났다. 추수감사제에 온 씨족원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음주와 가무(歌舞)를 즐겼다는 것은 벌써 가사(歌辭)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며, 특히 [[고구려]] [[유리명왕]]이 지었다는 〈[[황조가]]〉는 유명하다. 또 서기 28년에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으니 이것이 가락(歌樂)의 시초라는 기록이 있으나 <ref> 《[[삼국사기]]》〈[[:s:삼국사기/신라본기/제1권/유리 이사금#즉위 5년 (28년)|유리이사금 條]]〉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이 해에 백성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하여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ref> 확실치 않으며, 유리왕 9년(32년)에는 오늘날의 [[한가위]](秋夕)가 처음으로 마련된 듯하다.
 
사회 체제가 점차 정비됨에 따라 삼국의 각 사회에는 그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 복장의 모양과 빛깔이 각각 달리 제정되었다. 또 장례하는 풍습은 원시적인 유습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지배층의 무덤은 그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장대하게 구축되었고 많은 부장품을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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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의 발전 ===
[[파일:백호 조선고적도보.jpg|thumb섬네일|left|300px|고구려 [[강서대묘]]에서 볼 수 있는 사신도 중 하나인 백호도]]
현존하는 삼국 시대의 미술품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벽화이고, 다른 하나는 불상과 [[탑]] 등 불교 미술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