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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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두 차례의 태풍과 기상악화로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 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보호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력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방화를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이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이로서 몽골은 역사 시대 이래 중국 바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제2중국 국가는 중앙 유라시아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몽골 궁정의 사가들은 이전과 같이 《[[송사]]》에 이전 북방왕조들의 기록을 「열전」에 넣기보다는, 《[[요사]]》와 《[[금사]]》를 각각 편찬함으로써, 북방왕조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역사 기록의 조정은 하늘 아래 두 가지 동등한 황제제도의 존재가 함께 존재했음을 인정하였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대한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국 황제제도가 가진 중대한 특성, 곧 단일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몽골 제국의 카안 제도로 대체되었다. 중국인들은 카안들을 황제라 불렀으나, 이들 황제는 단지 전통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방대한 몽골 제국가 그 후계 국가들을 지배하는 카안의 여러 일면 중 중국적 성격만을 의미했을 뿐이다.<ref>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ref>
 
이로서 몽골은 역사 시대 이래 중국 바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제2중국 국가는 중앙 유라시아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몽골원나라 궁정의 사가들은사가들중 주자학을 따르는 학자들은 이전과 같이 《[[송사]]》에 이전 북방왕조들의 기록을 「열전」에 넣기보다는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요사]]》와 《[[금사]]》를 각각 편찬함으로써, 북방왕조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역사 기록의 조정은 하늘 아래 두 가지 동등한 황제제도의 존재가 함께 존재했음을 인정하였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대한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국 황제제도가 가진 중대한 특성, 곧 단일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몽골 제국의 카안 제도로 대체되었다. 중국인들은 카안들을 황제라 불렀으나, 이들 황제는 단지 전통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방대한 몽골 제국가 그 후계 국가들을 지배하는 카안의 여러 일면 중 중국적 성격만을 의미했을 뿐이다.<ref>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ref>
 
몽골은 몽골문화와 한화(漢化)를 병행하는 방침을 실행했는데 처음에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유가(儒家) 문화 중에서 서민문화 부분이 신속히 발전해 희곡(戱曲)이 흥성해졌다. 아울러 ‘원곡(元曲)’과 원잡극(元雜劇)이 ‘당시(唐詩)’와 ‘송사(宋詞)’의 뒤를 이어 중요한 문화체계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등 원말명초(元末明初)에 나타난 소설들은 비록 책이 완성된 것은 명대(明代)지만 작자들은 대부분 원조(元朝)에서 출생했고 이들의 거둔 성과 역시 원나라 때 서민문화가 유행한 것과 관련이 있다. 산수화와 화조화 역시 문인들의 정서를 드러내는 중요한 형식이 되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 때부터 부분적인 한화정책을 실시했다. 1307년 원성종(元成宗)은 공자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 봉했다. 1315년에는 원인종(元仁宗)이 과거제도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치 제도적으로 볼 때 원조는 기본적으로 수당에서 시작된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를 계승했다.<ref>{{웹 인용|url=https://ko.shenyun.com/learn/article/read/item/tcFrAUtBCgY/%EC%9B%90-%E5%85%83.html|제목=원(元) - 션윈예술단|언어=ko|확인날짜=2019-05-12}}</ref>
[[송 공제|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