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리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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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차이석은 본처 강이성(康利聖,1879년 출생)과 1899년 결혼하여 일찍이 4남을 얻었으나 어려서 잃고, 슬하에 1911년 영애와 1918년 영희 두딸을 얻었다, 부인 강이성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차이석의 부름에 1922년에 중국 상하이로 두 딸과 함께 가서 생계를 잇기 위하여 밥집을 하며 물심양면으로 윤봉길, 이봉창의사 등의 비밀결사 장소를 제공하고 비밀을 유지하였다. 강이성은 1932년 홍커우공원 천장절 기념식에서 윤봉길의사 폭탄투척 성공으로 혈안이된 일본이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리자 항저우로 임시정부를 옮긴 후 유랑의 길을 걷던 중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1940년경 둘째딸 차영희만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와 일제 감시하에 해방 때 까지 고초를 당하였다. 첫째딸 차영애는 부친 차이석과 함께 인성학교 교원 등으로 중국에 남아 사실혼 진장권과 독립운동을 하였다. 본처인 강이성여사는 해방 후 서울 마포구 연희동 498번지에서 둘째딸 차영희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1961년 4월 14일 사망 후 효창원 애국선열 묘역에 자리한 차이석묘소에 1961년 4월 18일 합장(1961년 4월 16일 동아일보 부고, 민족문제연구소 2018.11.26. 효창원 수난사는 왜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나? – 효창공원, 결국 애국선열묘역으로 남다. 식민지 비망록 41. 이순우 책임연구원 참조)되었다. 중국에서 본부인 강이성과 떨어져 지내던 차이석은 31세 과부인 홍매영과의 사이에서 1944년 서자 영조를 낳았다, 이때 차이석은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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