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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들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희]]는 폭군이었다.선비족화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은 [[모용보]]의 양자 이자 고구려인인 모용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씨로 고치고 국호인 연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한다.
후연 시기에 연나라는 [[고구려]]와 오랫동안 대치하거나 고구려에게 침략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408년]]에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으며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하였다. 사실상 후연(後燕)은 고구려의 속국이 된다.
고운은 친한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강한 권력을 갖게 하였는데 이반과 도인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이상 더 큰 권력을 주지 않는 고운을 원망하여 그들이 직접 군주가 되려고 [[409년]]에
풍발은 고운이 암살된 뒤 일어난 혼란을
내전 이후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에 종주국(宗主國)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기를 요청하였다. 결국 풍홍이 예측한 대로 [[436년]]에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 하였으며 이에 장수왕은 2만의 병력을 보내 북위군보다 먼저 용성에 도착해 풍홍과 수많은 후연 귀족들과 여성들과 백성들을 끌고갔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다가 장수왕에 반역을 일으키게 되고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의 처제와 자식을 인질로 잡고 풍홍은 고구려의 외곽지역인 북풍으로 강제 이송시킨다. 그러자 풍홍은 남조의 [[송 (남조)|유송]]에 망명요청을 했다. 이에 응한 송나라가 사신 왕백구를 고구려로 보내 풍홍을 망명시킬 것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풍홍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438년]]에
== 역대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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