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Huzzlet the bot (토론 | 기여)
잔글 로봇의 도움을 받아 동음이의 처리: 김홍집 - 김홍집 (1842년) 문서로 링크 바꿈
50번째 줄: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ref name="paryoung437"/>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다.<ref name="parkus258"/>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 (1842년)|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ref name="paryoung437"/>
 
=== 2차 봉기와 실패 ===
263번째 줄: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ref name="yukbi167">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7년 겨울호 (역사비평사, 1997)167페이지</ref>"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월,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은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하여 한성까지 오면 자신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척 할 것이니 적절히 싸우는 척 하다가 해산하라고 자신을 찾아온 일부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1842년)|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ref name="han2420"/> 한편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거사에는 위정 척사파 계열 유학자들도 동의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준용은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이 점을 설명했다.
 
==== 대원군, 이준용의 음모 탄로 ====
386번째 줄:
[[파일:Leejunyong-1918.jpg|썸네일|오른쪽|130px|[[이준용 (1870년)|이준용]], 수시로 민씨 정권 전복을 위해 동학 농민군과 접촉하였다.]]
 
서울에서 동학 농민군 일부와 대원군파는 은밀히 자객을 동원하여 개화파의 중진인물인 [[김홍집 (1842년)|김홍집]], [[김학우]], [[김가진]], [[안경수]], [[조희연]], [[유길준]], [[김종한]], [[이윤용]] 등을 암살하려 하였다.<ref name="piton319"/> 농민군은 이 계획에 협조한다.
 
이 암살계획은 동학농민군이 [[이준용]] 휘하의 [[통위영]]과 협력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하였던 [[1894년]] [[8월]] 중순경에 실천에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군국기무처 내에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반란 모의를 조사하자고 주장했던 김학우를 암살하는데 그침으로서 제한적인 결실만을 거두었다.<ref name="piton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