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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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 마포 고려 공민왕 내외 영정.jpg|섬네일|오른쪽|200px|[[조선]] 종묘 내에 있었던 고려 공민왕 내외 영정. 조선 건국후 [[이성계]]는 [[조선]]건국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고려 공민왕 내외의 영정을 그려 [[조선]]의 종묘에 봉안하였다. 이는 사실 고려가 공민왕 대에서 끝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자를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과 여색으로 시름을 달랬다.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辛旽)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使)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