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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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고가 사망한 이후 독립 운동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계속해서 이어갔다. 역시 성직자였던 그는 아카풀코, 칠판싱고 등 남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1813년 9월에는 점령한 주의 대표들과 함께 "칠판싱고 회의" 를 개최하여 멕시코의 헌법 제정과 공화정 수립, 노예제도 폐지와 토지 재분배 등의 사항에 합의하기도 했다. 모렐로스의 독립 운동은 독립하기 전까지 가장 진보적이고 민중적인 성향을 띠었지만, 결국 모렐로스가 1815년 체포되어 사형당함으로써 빛을 보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침략으로 본국이 혼란에 빠지자, 대표적인 왕당파였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와 그 때까지 남아있던 독립군 중 하나인 비센테 게레로,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손잡고 "이구알라 강령" 을 발표이이이이앙기모띠했다발표했다. 이 강령의 골자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주권을 마드리드에서 멕시코 시티로 가져오는 것었다. 이구알라 강령은 기득권층의 권리를 뒤집는 조치가 없이 오로지 독립만을 발표했기 때문에 대표적인 보수 세력인 교회나 지주들도 독립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에스파냐 국왕 페르난도 7세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 후안 오도노후는 이 강령을 거절했고, 이투르비데는 군대를 동원해 1821년 9월 27일 멕시코시티에 입성하고 다음 날 멕시코의 독립을 선포한다. 부왕 오도노후는 이투르비데와 멕시코가 부르봉 왕가의 사람을 군주로 삼는 입헌군주국이 된다면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코르도바 협상" 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의견은 페르난도 7세와 에스파냐 의회에 의해 기각되었고, 결국 1822년 9월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아구스틴 1세" 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1821년 12월 가비노 가인사를 중심으로 한 중앙 아메리카 연합(과테말라, 니카라과, 벨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이 멕시코에 가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