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12번째 줄:
|병력1=명나라 3만 6,800명<br /> 조선 2,215명 <br /> 총병력 약 4만 명
|병력2=7,000명~10,000명
|사상자1=
|사상자2= 불명
}}{{전역상자 정유재란}}
27번째 줄:
== 경과 ==
조·명 연합군의 중로군 본대는 [[1598년]] [[9월 20일]] 시마즈군이 주둔하고 있는 진주의 [[망진왜성]]과 [[영춘왜성]]을 점령하고,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육박하여 공세를 취하였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망진왜성, 영춘왜성, 곤양왜성에 주둔하던 병력을 철수시켜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에 투입하였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가와카미 다다노리]](川上忠実)에게 수백의 군사를 주어 사천고성을 지키게 해 대략 1 만석의 식량을 두었다. 이 시마즈군은 소수이면서도 완강하게 저항, 연합군을 도발했다. 그 후 동정군(東征軍)이 사천고성과 사천 선진리왜성에 압박을 가하자 시마즈는 사천고성을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켜 조명연합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병력을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사천고성에서의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9월 28일]] 밤,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천고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병력손실을 입고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철수했다. 조·명 연합군은 사천고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 선진리왜성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는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에게 명하여 적의 식량창고를 불태웠다.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식량창고가 불타버리자 한층 더 궁지에 빠지고, 단기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왜성의 뒤에 굳세고 튼튼한 진을 치고 복병을 배치했다. 요시히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량의 총을 사용하고 지뢰를 묻는 방법으로 연합군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 또한 쇳조각이나 철정을 포탄 대신에 장전 한 대포도 사용했다. 연합군이 공격하다 지치자 요시히로는 복병을 출동시켜 적의 대열을 끊어 교란, 요시히로 본대도 공세로 전환했다. 연합군은 양식문제로 고민하고있었고, 요시히로군의 공세에 지쳐 철수하고 만다.
== 각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