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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1592년]] [[11월 28일]], 숭덕제는홍 타이지는 [[누르가치]]의 측복진이었던 [[효자고황후 (청나라)|예허나라 몽고저저]]의 소생으로, 누르가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르가치의 차남 [[다이샨]], 누르가치의 아우인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阿敏,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ᠮᡳᠨ}}|Amin}}), 누르가치의 5남 망굴타이(莽古爾泰,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ᠮᠠᠩᡤᡡᠯᡨᠠᡳ}}|Manggūltai}}) 등과 함께 사대왕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 치세 ===
3년 후인 1631년, 홍 타이지는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를 포위했다.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성을 공격했다. 몇 주간의 전투, 협상, 그리고 지방 지휘관들의 갑작스런 변절 후에 대릉하성은 후금에 함락됐다. 이것은 점차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ref>{{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4~224}}</ref>
 
같은 해에 홍 타이제는타이지는 아민과 망굴타이를 제거하고 다이샨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체계적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 타이지에게 필요한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중국식 정치 방식이었다.
 
홍 타이지는 1629년에 문서처리 기구인 빋허이비트허이 보오(書房,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ᠪᡳᡨᡥᡝᡳ<br />ᠪᠣᠣ}}|Bithei Boo}})를 설립했고 이 기구에 [[한족]] 관료를 상당수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닝군 주르간(六部,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ᠨᡳᠩᡤᡠᠨ<br />ᠵᡠᡵᡤᠠᠨ}}|Ninggun Jurgan}})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닝군 주르간은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했다. 닝군 주르간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阿巴泰,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ᠪᠠᡨᠠᡳ}}|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7~168}}</ref>
 
1635년은 후금의 발전이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은 해였다. 한해 전에 천총한과홍 타이지와 상쟁하던 [[차하르]]의 수장이자 몽골의 카간인 [[링단 칸|릭덴릭단 카안]]이 사망한 후, 이 해에 릭덴 카안의 아들 [[에제이]]가 후금에 투항에 온 것이었다. 이로써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여진족|주션]]({{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ᠵᡠᡧᡝᠨ}}|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1~152}}</ref>
 
또한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인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손에 넣은 천총한은 이제 몽골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다.<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
 
1635년 11월 22일,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하고 '만주'를 공식적이고 유일한 족명으로 선포했다.
[[파일:Hong Taiji.jpg|섬네일|250px|평복차림의 [[숭덕제]]]]
 
1636년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팔기는 물론 내몽골 왕공 및 한족 무장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식을 올리고 [[칭기스 칸]]으로부터 이어져 온 몽골 제국의 전통을 완전히 복원·계승하였음을 보이는 것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시각으로, 옛 [[몽골 제국]]의 동쪽 절반을 청이 지배하는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스스로 세 언어로 된 칭호인 '''매우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신성한 군주'''(弘德彰武皇帝, {{llang|mnc|{{MongolUnicode|ᡤᠣᠰᡳᠨ<br />ᠣᠨ᠋ᠴᠣ<br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br />ᡝᠨᡩᡠᡵᡳᠩᡤᡝ<br />ᡥᠠᠨ}}|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llang|mn|{{MongolUnicode|ᠠᠭᠤᠳ‍ᠠ<br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br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br />ᠪᠣᠭᠳᠠ<br />ᠬᠠᠭᠠᠨ}}|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γan}})를 칭하였으며,<ref>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ref><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 국호를 기존의 아이신 구룬({{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ᡳᠰᡳᠨ<br />ᡤᡠᡵᡠᠨ}}|Aisin Gurun}})에서 다이칭 구룬({{llang|mnc|{{MongolUnicode|ᡩᠠᡳᠴᡳᠩ<br />ᡤᡠᡵᡠᠨ}}|Daicing Gurun}})으로 개칭하고, [[만주족만주인]]의 [[한]]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골의몽골인의 [[카간카안]]이 됐다. 이는 곧 만주족이 한인, 몽골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종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8~169}}</ref> 사강 세첸의 《[[몽고원류|몽골원류]]》는 누르가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숭덕제가 정권({{llang|mn|{{만몽 유니코드|ᠲᠥᠷᠥ}}|Törö}})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ref>{{서적 인용|author1=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page=195}}</ref>
 
같은 해, 숭덕제는홍 타이지는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감찰 기관인 도찰원(都察院,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ᡠᡥᡝᡵᡳ<br>ᠪᡝ<br />ᠪᠠᡳᠴᠠᡵᠠ<br />ᠶᠠᠮᡠᠨ}}|Uheri-be Baicara Yamun}})을 설립했다. 도찰원의 임무는 황제이게황제에게 간언하고, 버이러와 대신들의 불법을 규찰하며, 닝군 주르간을 감찰하고, 논의와 상주에 참여하며,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었다. 도찰원도 버이러들의 권력을 잠식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8}}</ref> 숭덕제는홍 타이지는 더 이상 여러 친왕(親王, {{llang|mnc|{{MongolUnicode|ᠴᡳᠨ<br />ᠸᠠᠩ}}|Cin Wang}})과 동등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유일한 황제([[천자]])였고, 기의 수장들은 관료의 일부분이었다. 이 움직임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했다. 하나는 남쪽의 광활한 땅을 정복하는 데에 적합한 최상의 정치 조직 형태를 제공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명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ref>{{서적 인용|author=William T. Rowe|authorlink=|title=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series=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27-9|page=40}}</ref>
 
1636년 당시 홍 타이지가 제위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 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했다. 홍 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ref>[http://kmib.co.kr/view.asp?arcid=0013084310&code=61171111&sid1=cul#RedyAi 병자호란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깨진 링크|url=http://kmib.co.kr/view.asp?arcid=0013084310&code=61171111&sid1=cul }}</ref> 홍 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홍 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의 소동으로 인해 인해 '미완'에 그쳤던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에서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의 사신이 아니라 국왕인 [[인조]]를 출성시켜 의례의 현장에서 자신과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묵던의 '황제 즉위식'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의례를 구현하고자 했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series=|year=2019|publisher=까치글방|page=300~301|isbn=9788972916826}}</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