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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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전라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는 남접과 서포 소속 동학군과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제2차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ref name="parkus451"/>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일본 제국|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북도]] [[전주부]] 삼례읍에서[[삼례역 (역참)|삼례역]] 역촌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이를 '제3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9월 봉기 또는 제3차 봉기, 삼례봉기로도 부른다.
 
==== 타협론과 결사항전론의 대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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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거쳐 금산을 점령하고,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청주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후퇴하였다.
 
 
=== 패전과 실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