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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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여 한국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료하기로 합의했다.
 
== 다양한 호칭 ==
* [[대한민국 정부]]와 대다수의 언론은 공식적으로 '''6·25 사변''' 혹은 '''6·25 전쟁'''<ref>[http://stdweb2.korean.go.kr/main.jsp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웨이백|url=http://stdweb2.korean.go.kr/main.jsp |date=20130520100250 }} 에서 '한국전쟁' 검색</ref>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 내전적 의미를 강조하는 경우 '''한국동란''', '''6·25 동란'''이라 불린다.
*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 '''6·25'''라고 한다.
* 육십갑자를 적용하여 '''경인동란'''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 영어 원문의 번역을 통해 '''한국 전쟁'''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 '6·25전쟁'이냐 '한국전쟁'이냐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21/2010062100181.html |출판사 = 조선일보 |날짜 = 2010-06-21 | 인용문 =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가 25일 개최하는 6·25 60돌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6·25전쟁의 명칭과 복합전적 인식'을 발표하는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한국전쟁은 미국식 용어로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이렇게 부르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ref>
* '''조선전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가끔 쓴다.<ref>정원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5&aid=0000571737 중국의 속내는… 행사 자제 속 ‘北·中-韓·美 대결구도’ 꺼려], 국민일보, 2013년 7월 26일</ref>
*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부분 학자들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ref>문예성,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5284653 中 당국, 북한 전승절 대표단 파견 전하면서 최초 항미원조→조선전쟁], 뉴시스, 2013년 7월 25일</ref><ref>오승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2164332 한·미·중의 ‘6·25 전쟁 재평가’ 의미], 문화일보, 2013년 7월 30일</ref>
* 미국과 [[캐나다]] 등 서구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벌어져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잊힌 전쟁'''<ref>이승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6322917 "잊혀진 승리" 미국 펜타곤에 한국전 전시관], 연합뉴스, 2013년 6월 19일</ref>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ref>이승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6330393 미국 노병의 마지막 '한국 방문 꿈'], 연합뉴스, 2013년 6월 23일</ref>
 
==배경 ==
1945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해방 직후 타의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해 나갔다. 소련은 소련군이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발발 직전의 정황|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1945년 8·15광복으로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우고, 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ref>[[중국 공산당]]은 1949년에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발발 직전의 정황|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중공(中共)이 국부(國府)를 물리치고 대륙에 공산정권을 세웠으며, ”--></ref> 반면에, 미국은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1949년 6월)<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발발 직전의 정황|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 1949년 6월에 이미 주한 미국군이 철수를 완료했으며 ”--></ref> 하고,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선언([[애치슨 선언]], 1950년 1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11200329201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1-12&officeId=00032&pageNo=1&printNo=1051&publishType=00020 美의 對極東防衛線은...]〉 《京鄕新聞》 (1950년 1월 12일) 1쪽. <!--“애치슨 國務長官은 美國의 極東防衛線이 臺灣東쪽에 있다고 宣言하였다. 則 「애」 長官은 十日의 上院外交委員會의 秘密會談에서 美國의 太平洋防禦線은 臺灣의 東쪽에 있으며 日本沖縄 比律賓을 連絡하는 線이라고 말하였다. 이 애치슨 長官의 言明은 秘密會談後 코나리- 上院外交委員長으로부터 發表
된 것이다.”--></ref> 을 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국은 소련 공산권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였으며, 소련 역시 그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