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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진주시의 행정 구역#연혁|설명=행정구역의 역사는}}
[[파일:진주지도.png|섬네일|400px|19세기 중엽 진주 모습]]
{{대동여지도|x=5.2|y=18.4|zoom=11|aspectRatio=1|설명=《[[대동여지도]]》}}
 
[[청동기 시대]] 유물로 보아 이 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기[[가야]]시대에는 변진의 소국인 [[고순시국]]이었으며, [[대가야]] 시대에 자타(子他)또는 자탄(子呑)이었다.<ref>상주함창에 있었다는 [[고령가야]]를 종종 지금의 진주일대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함창이 실제로는 가야에 속한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다.</ref> 삼국시대 [[백제]]의 거타성(居陀城)이었다.<ref>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주가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러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거열은 원래 옛 거창지방으로 거타와 비슷해서 혼동되었던 것이다. 한편 자타, 자탄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으로 코타コタ로 읽히는데 백제, 신라에서는 이를 그대로 거타(居陀)로 적었다.</ref> [[문무왕]] 때 [[통일신라]]에 편입된 후 치소로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고, [[신무왕]] 5년에는 청주(菁州), [[경덕왕]] 16년에는 강주(康州)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는 다시 청주(菁州)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