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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부(白山部) ===
끝으로 [[백산말갈]]에 대해서는 [[백두산]] 주변과 [[연변]] 지역 일대로 보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최근 [[함경도]] 쪽으로 내려 보거나 연변 지역과 한반도 동북부 지역을 모두 포괄한 것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병이 수천, 또는 7천이라고 나오는 속말말갈, 백돌말갈과 달리 백산말갈은 3천이라고 나온다. 따라서 거주지가 다른 말갈 집단보다 넓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돈화와 백두산 일대 지역이 백산말갈의 중심지였고, 그 외 연길·용정·훈춘과 경성 주변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한정될 것으로 본다.<ref name="KIM">{{서적 인용|author=김현숙|authorlink=|title=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series=|publisher=모시는사람들|year=2005|isbn=9788990699305|page=438~479}}</ref>
 
《[[구당서]]》에 "백산부는 본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평양]]이 수복된 후에 부중(部衆)이 많이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구절이 나오듯이, 백산말갈은 고구려 지배 아래 일찍부터 편입되었고 오랫동안 그 지배 아래 있었다. 따라서 백산말갈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고구려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발해 건국지가 돈화였던 것도 무관하지 않다.<ref>{{서적 인용|authorname=김현숙|authorlink=|title=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series=|publisher=모시는사람들|year=2005|isbn=9788990699305|page=438~479}}<"KIM"/ref>
 
그러나 백산말갈의 동쪽으로 비정되는 어떠한 말갈세력도말갈 세력도 없음을 감안하며 연해주 남부 일대까지를 고고학적으로 백산말갈의 맥락에서 이해해도 큰 지장은 없기 때문에, 고구려의 책성 치소로 꼽히는 연변과 함께 연해주 일대도 백산말갈의 거주지로 꼽힌다. 그런데 연변지역의 말갈에 대해서는 극히 적은 연구가 있을 뿐 그들의 고고학적 실체는 그리 뚜렷하지 않다. 말갈에 대한 지리적 비정을 한 20여 명의 관련 연구자들은 연변 일대를 중심으로 연변일대와 돈화, 백두산 일대로 본다.<ref>{{저널 인용|저자=강인욱|제목=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8|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46~47}}</ref>
 
문헌기록을 참고하면 [[관구검]]의 침략으로 연변~연해주 일대의 토착 [[옥저]]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고,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3~4세기 이 지역 유적이 공백이기라는 점으로도 반증된다. 그런데 4세기부터는편년 논란이 다소 편년에 논란이 있지만있지만4세기부터는 말갈 유적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블라고슬로베노예 유적이다. 이들 초기 말갈 유적은 폴체문화의 늦은 단계인 줼토야로프기와 매우 유사하다. 말갈문화가 폴체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한다.<ref>{{저널 인용|저자=강인욱|제목=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8|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55}}</ref> 백산말갈의 문화를 형성 주민들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 왔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ref group="주">''范恩實(2003), 「靺鞨族屬及渤海建國前的靺鞨與周邊關係」,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王小甫, 主編), 北京大學盛唐硏究叢書, 上海辭書出版社.'' 범은실은 고구려와 흑수부는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342년 고구려가 모용씨의 공격을 받으면서 북옥저 지구에 대한 세력이 약화되자 이 지역을 흑수부가 장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무구검의 고구려 침범으로 옥저 지역에 세력공백이 발생하자 숙신계가 이곳으로 진출하여 원래 이주해 있던 숙신 부락과 융합하여 백산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 이들이 고구려에 신속하게 된 것은 영락 8년(399년) 식신토곡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기 때문이며, 이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중원에 조공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백산부를 점거한 후에도 고구려가 그 지역으로 완전히 진입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백산부 지역에 고구려의 유적유물이 매우 적고, 일부 지역에 집중된 고구려성도 신라, 백제에 대한 방어용일 뿐이고, 군사활동 양상에서 말갈이 매우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ref> 말갈문화는 [[읍루]](폴체문화)와 강한 친연성을 보여주는데, 이미 폴체문화는 연해주 지역으로 기원 전후한 시기에 남하해서 토착화(올가문화)가 된 상태이다. 원래 연해주 일대에서 옥저계 문화로 간주되는 크로우노프카 문화는 1세기 이후에는 거의 소멸한 상태이다. 따라서 관구검이 침략했을 당시에 옥저계 문화라고 하는 집단들은 폴체계 문화를 위주로 하고 옥저계통의 문화가 일부 섞여있는 정도의 물질문화상이었을 것이다.<ref>{{저널 인용|저자=강인욱|제목=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8|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55~56}}</ref>
백산말갈의 문화를 만들어낸 주민들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 왔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ref group="주">''范恩實(2003), 「靺鞨族屬及渤海建國前的靺鞨與周邊關係」,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王小甫, 主編), 北京大學盛唐硏究叢書, 上海辭書出版社.'' 범은실은 고구려와 흑수부는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342년 고구려가 모용씨의 공격을 받으면서 북옥저 지구에 대한 세력이 약화되자 이 지역을 흑수부가 장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무구검의 고구려 침범으로 옥저 지역에 세력공백이 발생하자 숙신계가 이곳으로 진출하여 원래 이주해 있던 숙신 부락과 융합하여 백산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 이들이 고구려에 신속하게 된 것은 영락 8년(399년) 식신토곡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기 때문이며, 이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중원에 조공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백산부를 공제한 후에도 고구려가 그 지역으로 완전히 진입한 것은 아니라고 했
다. 백산부 지역에 고구려의 유적유물이 매우 적고, 일부 지역에 집중된 고구려
성도 신라, 백제에 대한 방어용일 뿐이고, 군사활동 양상에서 말갈이 매우 독립
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ref> 말갈문화는 [[읍루]](폴체문화)와 강한 친연성을 보여주는데, 이미 폴체문화는 연해주 지역으로 기원 전후한 시기에 남하해서 토착화(올가문화)가 된 상태이다. 원래 연해주 일대에서 옥저계 문화로 간주되는 크로우노프카 문화는 1세기
이후에는 거의 소멸한 상태이다. 따라서 관구검이 침략했을 당시에 옥저계 문화라고 하는 집단들은 폴체계 문화를 위주로 하고 옥저계통의 문화가 일부 섞여있는 정도의 물질문화상이었을 것이다.
 
연해주 남부 일대의 백산말갈 지역에서 말갈토기는 아브라모프카, 라코프카 유적 등의 출토 예가 있다. 이들은 주변의 다른 말갈 지역의 토기와 비교했을 때 말갈관의 특징은 날렵한 편이며 동체의 상반부에 2~3열의 단사선문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아브라모프카 유적 출토의 말갈관은 무덤무덤에서 출토이며출토되었고, 발해계통의 영향을받은영향을 흔적이받은 전혀흔적이 없다. 반면에 라코프카 유적에서는 병형 토기 및 물결무늬와 같은 발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비교적 뚜렷하게 보인다확인된다. 이와 같이 연해주 일대는 무덤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5세기 이후 말갈계통의 문화가 성립되어서 발해의 유입 이전까지 독특한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성한다고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추정된다. 이와 같이 백산말갈은 이 지역 토착민들이 북옥저와 읍루계통의 사람들이 기반이 되어 성립되었다.<ref>''강인욱(2018),{{저널 인용|저자=강인욱|제목=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8|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57~58}}</ref>
이러한 초기 백산말갈의 양상은 이 시기의 유적이 거의 없는 연변지역보다는 [[연해주]]에서 더 쉽게 확인된다. 그리고 그 말갈의 양상은 말갈계 문화를 대표
하는 토기인 ‘말갈관’으로 알 수 있다. 말갈관은 심발형 기형에 외반구연에 동체
부가 타원형에 가깝게 넓어지는 평저토기이다. 그 태토에는 사립이 많이 섞인 적갈색계통이며 물레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수제토기이다. 그 표면에는 타날문
이 시문된 경우도 있으며, 돌대문이 구연부, 견부에 돌아가며 단사선문이 동체
에 시문되기도 한다. 말갈관은 그 형식적인 특징이 매우 뚜렷하기 때문에 넓게
는 말갈계 문화를 규정하는 표지유물로 역할을 한다. 또한, 그 구연부, 문양, 기
형 등 세부적인 형식 들은 말갈 영역 내에서도 뚜렷한 시공적인 범위를 형성하
기 때문에 말갈 내에서도 지역적인 차이(특히,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을 가름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사용된다. 초기 철기시대의 다양한 문화와 토기양식에서 말갈관과 가장 유사한 기형은 폴체문화의 토기임은 한국은 물론 [[러시아]], [[중국]]
및 [[일본]]의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나팔처럼 벌어지는 구연부, 타날문, 구연 및 견부의 돌대문 등이 그 좋은 예이다. 폴체문화의 마지막 단계(1~3세기)인 쿠켈레보기의 토기와 가장 유사한 토기는 말갈 중에서도 아무르 동쪽(즉, [[삼강평원]]에서 북쪽으로 러시아 경내)에서 주로 존재하는 블라고슬로벤노예-나이펠트 그룹으로 이어진다.
 
7세기 중반 이타인은 책성도독겸양병마(柵城都督兼揔兵馬)의 관직을 맡아 고구려의 12주와 함께 말갈의 37부를 총괄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책성이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주()와 같은 일반행정단위와 함께 말갈 제부를 관할했음을 말해준다.<ref name="LEE">''이정빈(2018),{{저널 인용|저자=이정빈|제목=6세기 중·후반 요서말갈(遼西靺鞨)과 돌궐·고구려」,|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2|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32~33}}</ref> 6~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는 제성(諸城)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제성은 규모와 기능에 따라 대성(大城)·성(城)·소성(小城) 등으로 구분되었고, 그마다 각급의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며 상하 통속관계에 있었다.<ref>''임기환(2012),{{저널 인용|저자=임기환|제목=고구려의 연변 지역 경영-柵城과 新城을 중심으로-」,『동북아역사논총』|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27601|날짜확인=2019년 38,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38|날짜=2012년|쪽=92~94쪽''94}}</ref> 책성은 이 중에서 대성에 해당하였다.<ref name="LEE"/>
연해주 남부 일대의 백산말갈 지역에서 말갈토기는 아브라모프카, 라코프카 유적 등의 출토 예가 있다. 이들은 주변의 다른 말갈 지역의 토기와 비교했을 때 말갈관의 특징은 날렵한 편이며 동체의 상반부에 2~3열의 단사선문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아브라모프카 유적 출토의 말갈관은 무덤 출토이며 발해계통의 영향을받은 흔적이 전혀 없다. 반면에 라코프카 유적에서는 병형 토기 및 물결무늬와 같은 발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비교적 뚜렷하게 보인다. 이와 같이 연해주 일대는 무덤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5세기 이후 말갈계통의 문화가 성립되어서 발해의 유입 이전까지 독특한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백산말갈은 이 지역 토착민들이 북옥저와 읍루계통의 사람들이 기반이 되어 성립되었다.<ref>''강인욱(2018), 《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 『동북아역사논총』61.''</ref>
 
7세기 중반 이타인은 책성도독겸양병마(柵城都督兼揔兵馬)의 관직을 맡아 고구려의 12주와 함께 말갈의 37부를 총괄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책성이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州와 같은 일반행정단위와 함께 말갈 제부를 관할했음을 말해준다.<ref>''이정빈(2018), 「6세기 중·후반 요서말갈(遼西靺鞨)과 돌궐·고구려」, 『동북아역사논총』61''</ref> 6~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는 제성(諸城)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제성은 규모와 기능에 따라 대성(大城)·성(城)·소성(小城) 등으로 구분되었고, 그마다 각급의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며 상하 통속관계에 있었다.<ref>''임기환(2012), 「고구려의 연변 지역 경영-柵城과 新城을 중심으로-」,『동북아역사논총』 38, 92~94쪽''</ref> 책성은 이 중에서 대성에 해당하였다.
 
돈화·용정·화룡 등에서 발해 시기 백산말갈의 6기의 주거 유적인 영안(永安) 유적은 확인되었다.<ref>{{서적 인용|author=송기호|authorlink=|title=발해 사회문화사 연구|series=|publisher=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year=2011|isbn=9788952111470|page=38}}</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