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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는 육현(지금의 [[안후이 성|안휘성]] 육안 부근)의 평민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 "형벌을 받을 운명이나 후에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다. 그 뒤에 법을 어겨 경형(얼굴에 죄목을 문신으로 새기는 형)을 받자 스스로 예언이 이루어졌다 여기고 기뻐했으나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로부터 '''경포'''(黥布)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포는 형벌로 노역에 동원되어 여산에 끌려갔는데 여산에서 같이 노역하는 죄수들을 모았고 이후 이들을 이끌고 여산에서 달아나 [[양자강]]에서 도둑 떼를 이루었다.<Ref name="s91">[[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91 경포열전제31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91|사기 권91 경포열전}}</ref>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음력 7월 [[진승]]과 [[오광]]의 [[진승·오광의 난|난이 일어나자]] 동료들을영표와 모아수적때들은 파군 [[오예]]에게 가담해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영표는 오예의 신임을 받아 그 사위가 됐다.<ref name="s91" /> 2세 2년 음력 9월 [[장한]]의 진나라 군대가 진승, 여신을 차례대로 무찌르자, 영포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북진 청파지역에서 진나라의 좌우 교위를 무찌른 뒤 동쪽으로 진격한다. 이시기 [[항량]]이 회계와 강동을 평정한 [[양자강]]을 넘어오자 동양현의 민란군 수장 [[진영 (전한)|진영]], 포장군등이 항량에게 합류하는 일이 있었고, 이세 3년(기원전 208년) 음력 2월 영포도 포장군과 같이 항량의 군대에 합세했다. 이후 영표는 항량이 부하로 경구 · 진가 등을 공격할 때 참전해 선봉에 서 싸웠고, 이세 3년음력3년 음력 6월 항량이 [[초 의제]]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당양군이 됐다.<ref name="s91"/>
 
이세2세 3년(기원전 208년) 음력 9월 항량이 [[장한]]의 공격을 받아 정도에서 죽자. 초 회왕의 명령으로 당양군 영포도 장수들과 함께 천도한 수도 팽성에 모였다. 얼마뒤 장한의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거록성(巨鹿城)을 포위하자, 초나라는 조나라 구원군을 편성해 상장군 송의를 중심으로대장으로 조나라삼고 구원군이거록으로 결성되고출진한다. 영포도 장군으로 구원군에 배속되어 진나라 장한이 포위한 거록으로 향한다. 11월 거록으로 향하던 중 대장인 송의와 차장인 장안후(長安侯) 항우 사이의 갈등으로 항우가 상관인 송의를 살해하였고, 영포를 포함한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항우를 따른다. 당양군 영포는 항우의 지시로 선발대를 이끌고 먼저 거록에 가서 장한의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고, 이후 항우의 본대와 같이 거록을 포위한 진군을 격파하고 조나라를 구원했고, 이세 4년(기원전 207년) 음력 7월에는 은허에서 장한의 항복을 받는 대승을 거둔다.([[거록 전투]]).<ref name="s912">[[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91 경포열전제31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91|사기 권91 경포열전}}</ref>
 
이세2세 4년 (기원전 206년) 음력 11월 당양군 영포는 항우를 따라 초나라 군대와 [[장한]]과 같이 항복한 진나라 군대과 같이 진나라의 본토로 쳐들어가던 도중, 신안에서 항우의 명령을 받아 진나라 병사 20여만 명을 밤중에 생매장해버린다. 음력 12월 함곡관에 도달한 항우의 군대가 함곡관을 막은 패공 [[전한 고제|유방]]에게 저지돼 넘어가지 못하자, 영포는 별동대를 이끌고 함곡관을 우회하여 기습해 함곡관을 함락하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들어간다.
 
의제 원년([[기원전 206년]]) 음력 2월 항우는 각지에 제후들을 분봉했는데, 영포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옛 초나라 영역을 넷으로 나눈 제후국중 하나인 구강의 왕에 봉해졌고, 수도은 육(현 [[중화인민공화국]]의 [[루안 시]])에 두었다.<ref name="s91" /> 4월에는 구강으로 이동했고, 8월 항우의 밀명으로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와 같이 장사로 천도하던 초 의제를 공격했고 10월 영포는 침현에서 초의제를 살해하였다.<ref name="s913">[[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91 경포열전제31 {{위키문헌언어-줄|zh|史記/卷091|사기 권91 경포열전}}</ref><ref>{{서적 인용|url=|제목=사기 표|성=사마천|이름=|날짜=|총서=|출판사=|확인날짜=|추신=진초지제월표}}</ref>
 
=== 서초에서 한으로 ===
 
한왕 2년([[기원전 205년]]), 제나라의음력 실권자1월 [[전영]]이항우는 얼마전 항우에게 불만을 품고 모반을 일으키자일으켜, 서초패왕이항우가 전영을임명한 치러제나라의 가면서제후왕을 구강의3명을 병사를모두 모으라는몰아내고 명령을제나라의 받았으나,제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전영]]이 공격하기 위해 구강왕 영포를 포함한 측근들을 소집한다. 그러나 영포는 병을 핑계대고 장수와 수천 명의 군사를군사들만 보냈으며,보내 참전하지 서초패왕이않았고 본국을이후 비운음력 사이4월 한왕 [[전한 고제|유방]]이 56만의 제후연합군을 이끌고 서초의 서울수도 팽성을 함몰하는데도함락하고, 서초를다시 항우가 반격하는 과정([[팽성 전투]])에서도 도와영포는 싸우지참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초패왕의 노를 사 꾸짖음을 받고 소환령을 받았으나 두려움을 품어 응하지 않았다. 서초패왕도서초패왕 항우도 당장 자신을 돕는 자가 구강왕뿐인데다 구강왕의 재능을 아껴 공격하지는 않았다.<ref name="s91"/>
 
한왕한편 [[전한팽성 고제|유방전투]]에서 일시크게 팽성을패하고 점령했다가목숨만 서초패왕의건져 반격을한왕 받아 대패하고([[팽성전한 전투고제|유방]]) 간신히에게 달아났는데, 알자알자직이었던 [[수하]]가 한왕을 찾아가 구강왕을 꾀어 한왕의 편을 들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구강왕은이에 유방이 이를 승인하자 수하는 부하 20명을 이끌고 한왕의 사신자격으로 회남으로 향한다. (작성중)수하는 회남에서 구강왕 경표와의 접견을 요구했지만 수하를경포는 만나, 수하의 변설에 넘어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비밀리에 약조했다. 마침 서초의 사자가 구강왕을 찾아와 군사를 내도록 독촉하려고 했는데, 수하가 구강왕의 변절을 드러내는 바람에 결국 초나라 사자를 베고 서초를 공격했다. 서초는 항성과 [[용저]]를 보내 회남을 공격하게 하고 서초패왕은 하읍을 공격했다. 몇 달 못 가 용저와 항성에게 격파당하고 한왕에게 달아났다. 한왕이 자신을 무례히 대하자 분노하고 후회해 자결할 생각까지 했으나, 한에서 제공한 관사의 대접이 매우 융숭해 기뻐했다. 한편 사람을 구강으로 보내 보니, 이미 [[항백]]이 구강의 병사들을 거두고 일가족도 모두 서초에 죽었다. 옛 구강왕의 병사 중 수천 명이 다시 구강왕의 밑으로 들어왔고, 한왕은 이들을 성고 수비군에 합류시키는 한편 한왕 4년([[기원전 203년]]) 7월에 구강왕을 [[회남 (전한)|회남]]왕으로 봉했다.<ref name="s91"/>
 
한왕 5년([[기원전 202년]])에는 구강의 몇 현을 얻었고, 한왕 6년([[기원전 201년]])에는 [[유고 (형왕)|유고]]와 함께 구강으로 들어가 서초의 대사마 [[주은]]을 회유했다. 이들은 함께 구강의 병사를 이끌고 한의 본대와 합류해 해하에서 초나라를 격파했다([[해하 전투]]). 항우가 죽고 한왕이 온 중국을 평정하면서 회남왕으로서 육을 서울로 삼고, 구강 · 여강 · 형산 · 예장군을 통치했다.<ref name="s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