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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고왕 대조영'''(渤海 高王 大祚榮, [[645년]] ~ [[719년]] [[6월]] <small>재위</small>: [[698년]] ~ [[719년]] [[6월]])은 [[발해]]의 초대 [[가독부|왕]]이다.
 
고왕(高王)과 [[발해]](渤海)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으로<ref>《[[구당서]]》([https://zh.wikisource.org/wiki/%E8%88%8A%E5%94%90%E6%9B%B8/%E5%8D%B7199%E4%B8%8B#.E6.B8.A4.E6.B5.B7.E9.9D.BA.E9.9E.A8 舊唐書]),「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ref> 서술했고, 반면 《[[신당서]]》(新唐書)에서 발해가 본래 고려(高麗)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고 서술되어 있다.<ref>《[[신당서]]》([https://zh.wikisource.org/wiki/%E6%96%B0%E5%94%90%E6%9B%B8/%E5%8D%B7219#.E6.B8.A4.E6.B5.B7 新唐書]),「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ref>
 
한국 측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신라고기]]》(新羅古記)와<ref>『三國遺事』 1,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기이 [[대조영]](大祚榮)을1, 말갈발해, “三國史云儀鳳三年, [[고구려]](句麗)宗戊寅, 장수라고高麗殘孽類聚, 기록하였다.北依
太伯山下, 國號渤海. …… 又新羅古記云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大伯山
南, 國號渤海.”</ref>《[[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구장이라고 기록하였다.<ref>『帝王韻紀』 下卷, “前麗舊將大祚榮 得擧太白山南城 於周則天元甲申 開國 乃以渤海名.”<ref/>
 
== 생애 ==
=== 고구려 무장 ===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대조영에 관한 많은 견해가 표명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퉁구스족]]인 [[말갈족]]으로서, 고구려에 복속된 뒤, [[고구려]]화 과정을 거친 말갈계 [[고구려]]인<ref>김기흥, 《발해의 종족적 연원》, 동북아역사논총-33, 2011, 437쪽</ref> 또는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종족이라고 본다.<ref>노태돈, 《고대사산책 대조영, 고구려인인가 말갈인인가》 - 역사비평 1989-겨울호, 316쪽</ref> 대조영이 [[수나라]] [[개황]] 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하게된 [[속말말갈]]의 후손으로 보아, 그의 출자에서 고구려를 배제하는 학설도 존재한다.<ref>姚中岫(1979), 「海東 盛國-渤海史略」, 『牡丹江師院學報』 2期(『 高句麗渤海硏究集成』. 渤海 卷1, 哈爾濱出版社,  58~59쪽</ref>
 
6세기 후반,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사망한 직후 그의 세 아들인 [[연남생]]·[[연남건]]·[[연남산]]의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은 [[당나라]]에 망명했다.
 
[[당나라]]는 [[667년]]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의 합류로 [[고구려]]는 크게 무너져 [[당나라]]는 파죽지세로 [[평양성]]은 으로 진격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대조영이 [[수나라]] [[개황]]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하게된 [[속말말갈]]의 후손으로 보아, 그의 출자에서 고구려를 배제하는 학설도 존재한다.<ref>姚中岫(1979), 「海東 盛國-渤海史略」, 『牡丹江師院學報』 2期(『 高句麗渤海硏究集成』. 渤海 卷1, 哈爾濱出版社,  58~59쪽</ref>
 
=== 고구려 부흥 운동과 발해 건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