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푸리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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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이러한 다양한 속성들도 결국 단 하나의 본질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인 이상 행복이란, 이러한 속성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본질에 일원화시키는 방향보단, 그것이 하나의 본질에 근거한 자연원리에 맞게 운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바뤼흐 스피노자]] 이후의 [[노력|코나투스]]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 아소시아시옹 논쟁 ==
샤를 푸리에의 공산촌 개념은 반체제 언론인이었던 빌헬름 슐츠의 《국가사전》을 통하여 유럽 각지로 퍼지게 되었다. 이 개념은 수많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는데, 대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피에르조제프 프루동]]과 [[카를 마르크스]]의 '아소시아시옹 논쟁'이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은 [[1842년]] 쓴 《경제적 모순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에서 [[앙리 드 생시몽]]과 [[샤를 푸리에]]의 공산촌 소유 구조 체계를 '노동자 아소시아시옹'는 독자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노동자 아소시아시옹이 종래의 국가 체계를 완전히 대체하는 인민의 공동체이며, 이러한 공동체는 과거 국가 체계의 모든 요소가 사라지기에 권력 구조도 종래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구조로 대체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 아소시아시옹의 형성은 국가에서 비국가로 나아가는 형태이며, 그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장벽, 즉, '국가적인 것'과 어떠한 연쇄성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카를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을 통하여 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카를 마르크스]]는 [[게오르크 빌헬름 헤겔]]의 '지양'(Aufheben) 개념을 국가의 발전 양상에 적용하여 앙리 드 생시몽과 샤를 푸리에 등이 주장한 공산촌 구상은 국민국가의 틀에서의 내적 혁명을 통해 발생한 한 사회 구조의 형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아소시아시옹'이 종래의 국가 속성에 기반한 상태로 발전해나간 개념이며, 당연히 과거 관념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아소시아시옹 구상은 하나의 국가 통치 체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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