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4세 (프랑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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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 ==
앙리 4세는 백성들로부터 앙리 대왕(''Henri le Grand'')이라는 칭송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밝고 유쾌한 성격이어서 친구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적·종교적 문제로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특히 [[낭트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게 결정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원한을 사게되었다. 이후 그는 무려 17차례나 암살 위기를 겪어야 했다.<ref>시부사와 다쓰히코《독약의 세계사》(가람기획)P79</ref> 결국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독일의 율리히 공작령 계승 문제를 두고 루돌프 2세와 개신교 제후들이 갈등을 보이자, 개신교 신도들을 도우면서 [[합스부르크]]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규모 원정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쉴리공작을 만나러 가다가, 넘쳐나는 [[마차]]들로 인해 정체상태였던 파리 시가지에서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에게 칼로 암살당했다.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하는 가운데 그의 장남 [[루이 13세]]가 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재위 당시 성군으로서 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나 [[1610년]] [[파리 시]]에서 로마 가톨릭 교인의 손에 암살당하였다. 그는 [[1610년]] 살해될 때까지 20차례 이상 암살 기도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예수회]]의 관련성이 끊임 없이 거론되었다. 특히 [[1594년]] [[예수회]] 콜레주 학생 장 샤스텔의 암살 기도 후 예수회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ref>이영림《얀센주의와 프롱드난 : 아르노 당딜리의 마자리나드를 중심으로》역사학보 제182집,P197~228)</ref> 그의 사망후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하는 가운데 그의 장남 [[루이 13세]]가 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