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대한만세 (토론 | 기여)
태그: m 모바일 웹
대한만세 (토론 | 기여)
태그: m 모바일 웹
31번째 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반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되어 쌍방간의 적개심으로 일어났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정]]청과 협조적이었다.<ref name="서중석">《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역사학자)|서중석]] 저. p80~p82</ref>
 
그러나, [[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짓고 3.1절 기념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3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고 해명하면서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