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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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통감부]]는 [[어니스트 베델|베델]]과 [[양기탁]]이 돈을 착복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한국통감부]]는 윤웅렬에게 "보상금 3만원 중 [[어니스트 베델|베델]]과 [[양기탁]]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청원서를 제출토록 사주하였다. 윤웅렬은 이 사주에 따라 국채보상금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ref name="ynjang26">장동학, 《한국경제 100년 과연 어떤일이?》 (무한, 2002) 26페이지</ref> [[어니스트 베델|베델]]이 모금한 금액 중 2만원을 이자를 조건으로 타인에게 빌려주었다가 이자는커녕 원금도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자 의혹은 사실처럼 확산되었다.
 
[[1908년]] [[8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인 [[윤웅렬]]은 보상금 중 3만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했다 하여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어니스트 베델|베델]]은 이를 거부하였고, [[윤웅렬]]은 보상지원금 총합소장직을 사퇴한다. [[일본]]의 책동에 편승하여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는 [[어니스트 베델|베델]]과 [[양기탁]]이 국채보상금을 횡령했고, 그 사실이 탄로났다고 기사화하였다.<ref name="ynjang26"/> [[윤웅렬]]은 [[어니스트 베델|베델]]에게 일부 맡긴 국채보상금 중 베델은 고리대금을 하였으나 일부 금액은 끝내 환수하지 못했고, 베델과 조선 국내 여론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 양기탁의 무죄와 운동의 와해 ===
결국 재판에서도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의 기부금들을 사익사금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이 법정에서 인정되어 무죄로 풀려나 누명을 벗었지만 통감부의 착복 소문으로 인해서 국채보상운동은 이 때를 계기로 점차 사그러지기 시작하였고 일부에서는 양기탁 등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까지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참여 저조와 통감부의 착복 소문으로 인해서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그렇게 와해되었다.
 
== 국채보상운동 발기 연설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