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7
태그: 대체됨
잔글 189.3.167.66 (토론)의 1개의 편집을 CYAN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TW)
1번째 줄:
{{원나라 표}}
47
{{중국의 역사}}
{{몽골의 역사}}
 
'''대원'''(大元, {{llang|mn|{{만몽 유니코드|ᠳᠠᠢ<br>ᠦᠨ}}|Dai Ön}}, {{llang|mn|{{만몽 유니코드|ᠳᠠᠶᠠᠨ}}|Dayan}})<ref>陳得芝,「關於元朝的國號、年代與疆域問題」,北方民族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2009年第3期(總第87期).</ref><ref>烏蘭(1990),, 《Dayan與“大元”-關於達延汗的汗號》 , 內蒙古大學學報 1호.</ref><ref group="주">森川哲雄(2008),「大元の記憶」,『九州大学大学院比較社会文化研究科紀要』14巻, 그러나 《[[몽고원류]][Erdeni-yin tobči]》나 《시라 투우지(Sira tu'uji)》등의 [[몽골 문자|몽문]] 연대기가 편찬된 17~18세기에는 이미 '다얀'의 본래의 뜻이 거의 잊혀져 그 뜻은 '대원'이 아니라 '모두'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ref>은 '''다이운 예케 몽골 울루스'''(大元大蒙古國, {{llang|mn|{{만몽 유니코드|ᠳᠠᠢ<br>ᠦᠨ<br />ᠶᠡᠬᠡ<br />ᠮᠣᠩᠭᠣᠯ<br >ᠦᠯᠦᠰ}}|Dai Ön Yeqe Mongɣul Ulus}})<ref>Volker Rybatzki, Igor de Rachewiltz-The early mongols: language, culture and history, p.116</ref><ref>陳得芝,「關於元朝的國號、年代與疆域問題」,北方民族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2009年第3期(總第87期)。</ref>, '''다윤 예케 울루스'''(大元國, {{llang|mn|{{만몽 유니코드|ᠳᠠᠶᠤᠨ<br />ᠶᠡᠬᠡ<br >ᠦᠯᠦᠰ}}|Dayun Yeqe Ulus}})라고도 한다.<ref>珠栄嘎(1991),『阿勒坦汗伝』, 內蒙古人民出版社, 232쪽.</ref>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이 기존의 [[몽골제국]]의 세계 통치를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로 《주역(周易)》에 나오는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대원(大元)'이라는 글귀를 따 삼은 몽골제국의 한자식 국호이다.<ref>{{서적 인용|author1=윤영인|author2=이용규|author3=김선민|author4=Allsen, Thomas|author5=Biran, Michal|author6=테무르|author7=Crossley, Pamela Kyle|author8=이시바시 다카오|authorlink=|title=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isbn=9788961871976|page=76}}</ref><ref>{{서적 인용|author1=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page=143}}</ref> 다음과 같이 쿠빌라이 카안에 의해 국호가 바뀐 후의 제국 시기를 '대원'이라고 하여, '대원'이 하나의 특정 기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으며,<ref group="주">{{서적 인용|author1=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 김호동은 한자식 국호의 제정, 상도와 대도로의 천도 등이 몽골제국 동쪽 지역이 독립된 중국 왕조로 변화 내지 재탄생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비록 한문으로 된 문헌에는 그와 같은 오해를 유발시키는 기록들이 많이 보이지만, 쿠빌라이 카안 본인을 비롯한 당시의 몽골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f> 특히 몽골제국 시대는 형용사의 '대'(大, {{llang|mn|{{만몽 유니코드|ᠶᠡᠬᠡ}}|Yeqe}})가 제국과 몽골 황실과 관련된 주요 용어 였음이 판명됐다.<ref>{{서적 인용|저자=志茂碩敏|날짜=1995|제목=モンゴル帝国史研究序説|출판사=東京大学出版}}</ref> 따라서 최근에는 '원' 등의 호칭은 몽골 정부로의 실태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몽골 제국사 연구에서 [[:ja:杉山正明|스기야마 마사아키]]로 대표되는 [[일본]] 연구자 사이에서는 '''대원 울루스'''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빈도가 증가하고있다.<ref>{{서적 인용|저자=杉山正明|날짜=1996|제목=モンゴルの帝国の興亡 (上·下)|출판사=講談社現代親書}}</ref><ref>{{서적 인용|author1=杉山正明|authorlink=|title=モンゴル帝国と大元ウルス|series=|publisher=京都大学学術出版会|isbn=4-87698-522-7|year=2004}}</ref> [[대한민국]]의 [[김호동]]은 최근 일부 학계에서 '대원 울루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하고 '대원'이 [[몽골제국|대몽골 울루스]]의 한자식 국호였다고 주장하면서,<ref>김호동(2006), 《몽골제국과 '大元'》, 역사학보 192권 192호, 249쪽.</ref> '원’이란 사람들에게 친숙한 국호를 쓰는 대신 모든 울루스를 아우르는 황제국을 의미하는 '''카안 울루스'''({{llang|fa|جوجي قاآن|Ūlūs-i Qā'ān}})<ref>{{저널 인용|저자=김호동|날짜=2006년 12월 31일|제목=몽골제국과 '大元'|저널=역사학보|출판사=역사학회|호=192|쪽=234}}</ref>라는 명칭을 사용한다.<ref>[http://m.hankookilbo.com/news/read/201601221195362520|몽골 황제는 ‘칸’이 아닌 ‘카안’이었다]</ref>
 
1271년 12월 18일 쿠빌라이 카안은 ‘대원(大元)’을 새로운 국호로 정했음을 알리는 「건국호조(建國號詔)」를 선포했는데, 그 전문은 《[[원사]]》 · 《원전장(元典章)》에 수록되어 있다.<ref> 《元史》卷7(世祖4), pp.138~139; 大元聖政國朝典章 (臺北, 國立故宮博物院印行, 1976), 卷1(詔令1).</ref> 이 조칙에는 과거 중화제국들의 국호가 [[진나라|진]]·[[한나라|한]]과 같이 처음 흥기한 지명을 따르거나 [[수나라|수]]·[[당나라|당]]과 같이 작읍을 받은 지명을 따랐던 전례가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칭기스 칸이 초창한 이래 몽골인들이 성취한 대업에 적절한 이름을 지을 필요성을 절감하여, 《역경》에 나오는 ‘대재건원’에서 그 뜻을 취하여 ‘대원’이라는 명칭을 정했음 분명히 기록하였다. 《경세대전(經世大典)》 「서록·제호」는 ‘원(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이라는 것은 ‘크다’(大)는 것이다. 커서 다함이 없는 것을 일컬는 것이니, 원이라는 함은 큰 것의 지극함이다.”<ref>7) 國朝文類 (四部叢刊初編集部, 上海: 商務印書館 印行), 卷40, p.414.</ref> 따라서 ‘대원’이라는 국호의 의미가 ‘크다’는 뜻을 극도로 강조한 추상적 개념이며, 과거 당나라 등이 스스로를 높여 대당(大唐)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달리 ‘대원’은 처음부터 이자국호였었음을 알 수 있다.<ref>{{저널 인용|저자=김호동|날짜=2006년 12월 31일|제목=몽골제국과 '大元'|저널=역사학보|출판사=역사학회|호=192|쪽=223}}</ref>
 
그러나 쿠빌라이 카안이 '대원'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제정한 이후,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국호는 더 이상 중지된 것이 아니라 '대원'이라는 국호와 일체화되었다. 1335년에 한문과 그것을 [[몽골 문자|몽골문]]으로 번역하여 작성된 《장씨선영비(張氏先塋碑)》에서 한문 '황원(皇元)'은 몽골문 '예케 몽골 울루스'로 번역되어 있고, 1346년에 작성된 《칙건흥원각비(勅建興元閣碑)》에서 '아원(我元)'이라는 한문 구절이 '예케 몽골 울루스'로 번역돼 있다.<ref group="주">본디 이자국호로 지어진 ‘대원’이라는 명칭은 대당(大唐) 등과 같은 용례에 견주어져, ‘대(大)’자는 자고(自高)의 의미를 지닌 형용어로 인식됨으로써 ‘원’이 일자국호처럼 사용되기에 이르렀으니, ‘황원(皇元)’·‘아원(我元)’이 이 용례 중 하나이다.</ref> 나아가 1338년에 작성된 《달로화적죽온태비(達魯花赤竹溫台碑)》에는 '대원'이 '대원이라 칭하는 예케 몽골 울루스'({{llang|mn|{{만몽 유니코드|ᠳᠠᠢ<br>ᠦᠨ<br />ᠺᠡᠮᠡᠺᠦ<br />ᠶᠡᠬᠡ<br />ᠮᠣᠩᠭᠣᠯ<br >ᠦᠯᠦᠰ}}|Dai Ön qemeqü Yeqe Mongɣol Ulus}})<ref>《蒙漢詞典》,內蒙古大學蒙古學研究院蒙古語文研究所編,內蒙古大學出版社1999年出版,第243頁。</ref>로 번역되어 있으며, 1362년에 세워진 《추봉서녕왕흔도비(追封西寧王忻都碑)》에는 '대원 예케 몽골 울루스'({{llang|mn|{{만몽 유니코드|ᠳᠠᠢ<br>ᠦᠨ<br />ᠶᠡᠬᠡ<br />ᠮᠣᠩᠭᠣᠯ<br >ᠦᠯᠦᠰ}}|Dai Ön Yeqe Mongɣul Ulus}})<ref>陳得芝,「關於元朝的國號、年代與疆域問題」,北方民族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2009年第3期(總第87期)。</ref><ref>Volker Rybatzki, Igor de Rachewiltz-The early mongols: language, culture and history, p.116</ref>로 나타나 있다. 이들 비문은 모두 몽골식 국호인 '예케 몽골 울루스'가 몽골의 중국지배가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사용되었음을 입증해 준다.<ref>{{저널 인용|저자=김호동|날짜=2006년 12월 31일|제목=몽골제국과 '大元'|저널=역사학보|출판사=역사학회|호=192|쪽=225~226}}</ref>
 
1368년에 카안 울루스가 [[명나라]]의 [[주원장]]에 의해 중원에서 [[북원|철수한 뒤]]에도 '대원'이라는 국호는 몽골 초원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에센 타이시|에센]]과 [[다얀 칸]]은 명나라를 상대로 각각 '대원전성가한(大元天盛可汗)'과 '대원대가한(大元大可汗)'을 자칭한 서한을 보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몽골 초원에서는 '대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북원|대원]]'과 그 국호는 1634년 [[차하르]]의 [[링단 칸|릭단 칸]]의 죽음과 [[청 제국]]의 복속으로 인해 소멸했다고 여겨진다.<ref>{{저널 인용|제목=大元の記憶|날짜=2008|저자=森川哲雄|출판사=九州大学院比較社会文化研究院}}</ref>
 
차하르를 꺾고 내몽골 초원의 유목민을 모두 복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차하르 칸 가문에 전해 오던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손에 넣은 [[홍 타이지]]는 이제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가 선포한 다이칭 구룬은 몽골제국의 정통 계승을 지향하는 [[만주족|만주인]]과 몽골인 그리고 [[한족]]의 제국으로 변모했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year=2012|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ref>
 
== 역사 ==
{{참조|몽골 제국|설명 = [[쿠빌라이 카안]] 이전의 몽골 제국의 현황은}}
 
13~14세기 몽골제국은 역사상 존재했던 국가 중 가장 발대한 영토를 지닌 제국이었다. 가장 넓었을 때의 영토는 [[고려]]에서부터 [[헝가리]]에 이르렀고,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와 동유럽의 상당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었다.<ref>{{서적 인용|author1=데이비드 O. 모건|authorlink=|title=몽골족의 역사|series=역사 모노그래프|publisher=모노그래프|isbn=9788998309008|page=28}}</ref>
 
[[파일:Dai Ön Yeqe Mongghol Ulus.jpg|300px|섬네일|오른쪽|대원(예케 몽골 울루스)의 영역과 속령 그리고 종속국들의 지도.]]
 
쿠빌라이 카안의 집권 이후 카안 울루스는 중국적 제도의 도입, [[한족]] 관료들의 등용, 수도를 당시 '키타이(Kitai)'라고 불리던 내몽골ㆍ북중국 일대의 [[상도]](上都) 및 [[대도]](大都)로의 천도 등의 중국식 통치방식을 원용했다.<ref>{{서적 인용|author1=윤영인|author2=이용규|author3=김선민|author4=Allsen, Thomas|author5=Biran, Michal|author6=테무르|author7=Crossley, Pamela Kyle|author8=이시바시 다카오|authorlink=|title=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isbn=9788961871976|page=76}}</ref><ref>{{서적 인용|author1=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page=143}}</ref>
=== 몽골 제국의 재편 ===
[[1259년]] [[몽케 칸|뭉케 카안]]이 사천의 조어산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남송]] 원정군을 이쓸고 화이수이를 건널 예정이었던 [[쿠빌라이 카안|쿠빌라이]]와 몽골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후방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던 [[아리크 부케|아릭 부케]]간의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ref name="Hodong1"/>
 
쿠빌라이는 남송 원정을 중단하고 북상하다가, [[1260년]] 4월 내몽골 지역의 [[상도|개평]]에서 자신의 추종자들만 모아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카안]]의 자리에 올랐다. 아릭 부케는 이 소식을 듣고 같은 해 5월 카라코룸 부근에서 또 다른 쿠릴타이를 열어 즉위했다.<ref name="Hodong1"/>
 
쿠빌라이 카안은 1260년 여름 자신이 직접 몽골의 최정예 기마군단인 동방 삼왕가와 오투하 군대를 비롯한 병력을 이끌고 카라코룸까지 진출했지만 아릭 부케가 퇴각한 탓에 사로잡지 못했다. 오히려 이듬해 가을 아릭 부케 카안이 반격을 시작하여 카라코룸을 탈환했으며 11월에는 내몽골 북방의 시물투에서, 곧이어 겨울에는 시르겐 나우르에서 양자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승패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반 동안 충돌하지 않았다.<ref name="Hodong1"/>
 
그러나 1261년 말에 쿠빌라이 카안이 아릭 부케의 추종 세력인 차가다이 울루스의 [[알구]]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서아시아의 [[훌레구]]에게 각각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울루스의 통치자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곳에 있는 정주지대에 대한 관할권까지 위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쪽을 선택하도록 하면서 상황은 급작스럽게 바뀌었다.<ref name="Hodong1"/>
 
아릭 부케가 변절한 알구를 응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그의 추종자들은 사라지고 말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1264년 아릭 부케는 쿠빌라이 카안에게 투항했다.<ref name="Hodong1">{{서적 인용|저자=김호동|제목=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시리즈=아틀라스 역사 시리즈|출판사=사계절|날짜=2016년 1월 15일|isbn=9788958289326|쪽=136~137}}</ref>
 
칭기스 일족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은 쿠빌라이 카안의 집권으로 끝나지 않았다. [[툴루이]] 가문의 쿠데타에 대한 [[우구데이]]와 [[차가타이|차가다이]] 가문의 반발, 뭉케 집권 직후 두 가문에 대한 숙청에 따른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더나아가 불만은 툴루이 가문 내에서도 생겨났으니, 뭉케와 아릭 부케의 집안도 쿠빌라이의 즉위에 대해 매우 탐탁지 않은 심사였다. 차가다이 울루스의 알구가 사망하자 쿠빌라이가 차가다이 울루스를 장악하기 위해 보낸 심복이었던 바락이 쿠빌라이 카안에게 반기를 들고 곧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ref name="Hodong2"/>
 
당시 중앙아시아에는 차가다이 가문 이외에 또 다른 두 세력이 있었으니, [[카이두]]가 이끄는 우구데이 가문과 [[몽케 테무르|뭉케 테무르]]를 수장으로 하는 주치 가문이었다. 1269년 봄 바락과 카이두 그리고 뭉케 테무르를 대신한 베르케체르가 [[탈라스]]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트란스옥시아나]]의 정주지대 지배권을 논의했다. 그 결과 그 지역의 2/3은 바락이, 나머지는 카이두와 뭉케 테무르가 분할하기로 했으며, 몽골 유목민들이 정주지대로 내려가 약탈하는 것을 자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러한 합의에 만족하지 못한 바락은 1269~70년 후라산 침공을 단행했다. 그러나 함께 원정에 참전한 카이두 측 군대가 미리 귀환해버렸고, 그로 인해 바락은 [[아바카 칸]]의 군대와 헤라트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바락은 귀환 직후인 1271년 사망했고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패권은 카이두의 수중에 들어갔다.<ref name="Hodong2"/>
 
탈라스에서의 회맹은 쿠빌라이 카안에 대한 도전이었다. 원래 카안의 고유 영역인 정주지대 관할권을 놓고 자신을 배제한 채 제왕들이 모여서 결정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카이두는 어전으로 찾아와 복속의 뜻을 표시하라는 쿠빌라이 카안의 거듭된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인했디. 쿠빌라이 카안은 1265년 아들 [[노무칸]]을 북평왕(北平王)에 임명하여 서북 몽골에 주둔시키고 친카이 둔전을 실시하는 한편, 1270년에는 [[예니세이 강]] 유역에 오부단사관을 두었다. 카이두 세력이 팽창하자 1271년에는 노무칸을 알말릭에 진주시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으며, 1275년에는 [[무칼리]]의 후손 안동을 파견하여 그를 보좌케 했다.<ref name="Hodong2"/>
 
그러나 1276년에 평소 쿠빌라이 카안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툴루이 가문의 제왕들이 뭉케 카안의 아들 시리기를 카안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노무칸을 붙잡아 [[킵차크 칸국|주치 울루스]]로 보내고, 안동은 카이두에게 보내어 이 두 가문의 지원를 얻으려고 했다. 1282년 시리기 등이 투항함으로써 예상치 못했던 반란을 실패로 끝났지만, 이로 인해 카안 울루스의 서북 방위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특히 1285년~86년 카이두와 [[두아]]의 연합군이 [[위구리스탄]]의 카라호초와 베쉬발릭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사건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로인해 천산 위구르의 군주인 이디쿠트를 위시한 지배층은 [[감숙|감숙 지역]]의 영창 부근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288년에는 서역 주둔 장인들에게도 철수령이 내려져, [[투르판]] 지역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전역이 카이두의 수중에 들어갔다. 카이두는 차가다이 가문에 대한 지배권도 강화했다. 바락의 아들 두아는 카이두에게 부용하는 종속적인 지위에 만족해야 했지만, 알구의 두 아들 카반과 추베이는 1277년을 전후한 시점에 무리를 이끌고 쿠빌라이 카안에게 투항하여 숙주, 사주, 과주, 등 [[하서회랑]] 지역의 목지를 부여받고 카이두와 두아의 세력에 대치하며 카안 울루스의 서북 변경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ref name="Hodong2">{{서적 인용|저자=김호동|제목=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시리즈=아틀라스 역사 시리즈|출판사=사계절|날짜=2016년 1월 15일|isbn=9788958289326|쪽=138~139}}</ref>
 
쿠빌라이는 생전에 중앙아시아 제왕들의 반발을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 1287년 카안 울루스의 좌익(동방) 울루스의 맹주인 나얀이 쿠빌라이 카안이 일본 원정을 추진하면서 동방에 대한 징발과 통제를 강화하고 1285년에는 [[요양행성]]까지 설치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위기를 느낀 쿠빌라이 카안은 73세의 고령에다 [[통풍]]까지 감수하며 1287년 봄 기습적인 친정을 단행하여 나얀의 반란을 진압했다.<ref name="Hodong3"/>
 
한편 중앙아시아 방면의 카이두에 대한 진압 성과를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1289년 쿠빌라이 카안은 노무칸을 대신하여 [[친킴]]의 장자 캄말라를 [[지농]]으로 삼아 카라코룸에 진주시켰다. 그러나 캄말라는 항가이 산지 전투에서 패배했고 카이두의 군대는 카라코룸에 입성했다. 대원(몽골제국)의 상징적 중심지를 상실한 쿠빌라이 카안은 1289년 여름 다시 한 번 친정을 감행했고 카이두는 자발적으로 퇴각했다. 쿠빌라이 카안은 남송전의 영웅 바얀을 카라코룸에 주둔시키고 돌아왔으나 1291년에는 [[카말라|캄말라]]를 다시 북평왕에 임명하여 항가이 산맥의 동쪽 방위를 책임지게 했다. 항가이 서쪽에는 친킴의 또 다른 아들 [[원 성종|테무르]]를 주둔시켰다.<ref name="Hodong3"/>
 
1294년 쿠빌라이 카안이 붕어한 뒤 바얀의 즉위를 받은 테무르가 울제이투 카안으로 즉위했다. 서북방에 주둔하면서 그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테무르는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을 일체 중단하고, 제국의 군사력을 서북방 몽골 초원 방면으로 집중시켰다. 카라코룸 방면은 캄말라의 아들 [[예순 테무르]]에게 맡기고, 그 서쪽의 알타이 방면에는 자기 형 [[다르마발라]]의 아들인 [[카이샨]]을 주둔시켰다. 울제이투 카안의 전략은 조금씩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여 아릭 부케의 장남 유부쿠르, 시리기의 아들 울루스 부카, 카이두에게 투항한 투르타카 등이 귀순해왔다. 1298년에는 킵착계 장군인 총우르의 활약으로 전세를 회복했다. 마침내 1301년 카이샨이 이끄는 군대와 카이두와 두아 연합군 간에 알타이 남쪽 산지에서 대회전이 벌어졌다. 이때 부상을 입은 카이두는 퇴각한 뒤 사망하고 말았다.<ref name="Hodong3"/>
 
카이두 사후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한 두아는 우구데이 가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이두의 자식들 가운데 [[차파르]]를 우구데이 가문의 수령으로 지명했는데, 이로 인해 카이두 진영은 심각한 내홍을 겪게 되었다. 한편 두아와 차파르는 1303년 울제이투 카안에게 사신을 보내 복속 의사를 전하고 화평을 제의했다. 울제이투 카안은 내분의 종식을 알리기 위해 훌레구 울루스의 칸 [[울제이투]]에게 사신을 파견했고, 이로써 카이두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였다.<ref name="Hodong3">{{서적 인용|저자=김호동|제목=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시리즈=아틀라스 역사 시리즈|출판사=사계절|날짜=2016년 1월 15일|isbn=9788958289326|쪽=140~141}}</ref>
 
1260년경부터 쿠빌라이 카안의 집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몽골제국 즉, '대몽골 울루스'라는 거대한 정치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310년 차파르가 울제이투 카안에게 투항하고 그 휘하의 부민들이 대거 몽골 초원으로 이주함으로써, 우구데이계 울루스들은 카안 울루스에 흡수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원(몽골제국)은 4개의 대형 울루스로 정립되었다. 그것은 곧 유라시아 동부의 카안 울루스, 중앙아시아의 차가다이 울루스, 킵차크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주치 울루스, 그리고 서아시아의 [[일 칸국|훌레구 울루스]]였다.<ref name="Ulus"/>
 
그러나 이들 4대 울루스를 제외한 다른 울루스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 4대 울루스 내부에는 여전히 여러 개의 소형 울루스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제국이 이처럼 4개의 대형 울루스로 정리된 것은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울루스들 상호간의 역관계가 변화한 것이지, 제국의 구성 원리로서 울루스 체제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ref name="Ulus"/>
 
따라서 14세기 초경이 되면 몽골제국은 사실상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거의 독립적인 네 개의 대형 울루스, 즉 동방의 카안 울루스와 서방의 삼대 울루스로 분할되어 독자성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명분상으로는 [[카안]]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 제국이라는 통합성을 유지하였다.<ref name="Ulus">{{저널 인용|저자=김호동|날짜=2016|제목=울루스인가 칸국인가 ― 몽골제국의 카안과 칸 칭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저널=중앙아시아연구|호= 21|권=2|쪽=1~2}}</ref><ref name="Hodong4">{{서적 인용|저자=김호동|제목=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시리즈=아틀라스 역사 시리즈|출판사=사계절|날짜=2016년 1월 15일|isbn=9788958289326|쪽=142}}</ref>
 
=== 대외 정복 ===
[[파일:Mongol secret weapon.png|섬네일|전투 당일 코끼리 4 마리가 탑승 한 타워에있는 쿠빌라이 카안]]
쿠빌라이 카안은 [[화북|키타이 지역]]에서 정권을 강화한 후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남송을 정복하기 위해 남으로 대규모의 원정을 재개했다.<ref>{{서적 인용|저자=Rossabi, Morris|날짜=1994|제목=The reign of Khubilai Khan|저널=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권=6|출판사=Cambridge University Press|isbn=978-0-521-24331-5|쪽=429}}</ref> 쿠빌라이 카안은 1268년과 1273년 사이에<ref>{{서적 인용|저자=Rossabi, Morris|날짜=2012|제목=The Mongols: A Very Short Introduction|출판사=Oxford University Press|isbn=978-0-19-984089-2|쪽=77}}</ref> 부유한 양자강 유역을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장애물인 [[양양 (후베이 성)|양양성]]을 포위했다.<ref>{{서적 인용|저자=Ebrey, Patricia Buckley|날짜=2010|제목=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출판사=Cambridge University Press|isbn=978-0-521-12433-1|쪽=172}}</ref> 1274년 [[원나라의 일본 원정|일본에 대한 해상 원정]]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ref name="Morgan">{{서적 인용|저자=Morgan, David|날짜=2007|제목=The Mongols. Wiley-Blackwell|isbn=978-1-4051-3539-9|쪽=107}}</ref> [[운남]] 지역의 [[대리국]]을 통치하는 단(段) 일족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 카안 울루스의 신하로서 출정하여 강남의 남송에 대항하여 카안 울루스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단 일족은 카안 울루스 시기 비교적 독립적으로 대리를 통치할 수 있었다.<ref>{{서적 인용|저자1=Anderson, James A. |저자2=Whitmore John K.|제목=China's Encounters on the South and Southwest: Reforging the Fiery Frontier Over Two Millennia |날짜=2014 |출판사=BRILL|isbn=978-9004282483|쪽=146|url=https://books.google.com/books?id=YV1hBQAAQBAJ&pg=PA146}}</ref> 운남, [[귀주]], [[사천]]의 토사들과 지역 부족장들과 왕국들은 카안 울루스에 신속하여 그들의 지위를 보존받았다.<ref>{{서적 인용|last1=Herman |first1=John. E.|제목=Political Frontiers, Ethnic Boundaries and Human Geographies in Chinese History|날짜=2005|출판사=Routledge|isbn=978-1135790950|쪽=260|url=https://books.google.com/books?id=Y1mQAgAAQBAJ&pg=PA260}}</ref><ref>{{서적 인용|editor1-last=Crossley |editor1-first=Pamela Kyle |editor2-last=Siu |editor2-first=Helen F. |editor3-last=Sutton |editor3-first=Donald S. |title=Empire at the Margins: Culture, Ethnicity, and Frontier in Early Modern China |날짜=2006|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0156 |쪽=143|edition=illustrated|volume=28 of Studies on China|url=https://books.google.com/books?id=EtNVMUx9qIIC&pg=PA143}}</ref>
 
쿠빌라이 카안은 1276년 [[남송 공제]]의 항복을 받아내어 [[항주]]의 송도를 점령하였다.<ref name="Morgan"/> 이후 공제는 칭기스 일족의 공주와 결혼했다.<ref>{{서적 인용|last1=Hua |first1=Kaiqi |editor1-last=Heirman |editor1-first=Ann |editor2-last=Meinert |editor2-first=Carmen |editor3-last=Anderl |editor3-first=Christoph |제목=Buddhist Encounters and Identities Across East Asia|날짜=2018 |publisher=BRILL|location=Leiden, Netherlands|isbn=978-9004366152 |doi=10.1156/9789004366152_008|쪽=213|chapter-url=https://books.google.com/books?id=bGdjDwAAQBAJ&pg=PA213|chapter=Chapter 6 The Journey of Zhao Xian and the Exile of Royal Descendants in the Yuan Dynasty (1271 1358)}}</ref> 남송의 충신들은 수도에서 탈출하여 어린 아이를 공제의 동생이었던 [[남송 단종|조하]]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한족 출신의 장수 [[장홍범]]이 지휘하는 몽골군은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주로 한군을 이끌고 남송의 충신들을 격파했다. 결국 마지막 황제인 [[남송 소제|소제]]는 익사하여 송나라는 종말을 맞이했다.<ref>{{서적 인용|저자=Rossabi, Morris|날짜=2012|제목=The Mongols: A Very Short Introduction|출판사=Oxford University Press|isbn=978-0-19-984089-2|쪽=77~78}}</ref>
 
1281년 쿠빌라이 카안의 2차 일본 원정은 불순한 태풍 때문에 실패했다.<ref name="Morgan"/> 쿠빌라이는 [[안남]], [[참파]], [[자바 섬]]의<ref>{{서적 인용|저자=Rossabi, Morris|날짜=2012|제목=The Mongols: A Very Short Introduction|출판사=Oxford University Press|isbn=978-0-19-984089-2|쪽=113}}</ref> [[:jv:Krajan Singhasari|싱가사리 왕조]]<ref name="Coedes">{{서적 인용|last=Cœdès|first =George|제목=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출판사=University of Hawaii Press|날짜=1968|url=https://books.google.com/books?id=iDyJBFTdiwoC|isbn=9780824803681|쪽=198}}</ref>에 대한 대외 원정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다만 [[버간 왕조|버간]] 원정에서는 파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ref>{{서적 인용|저자=Rossabi, Morris|날짜=1994|제목=The reign of Khubilai Khan|총서=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권=6|출판사=Cambridge University Press|isbn=978-0-521-24331-5|쪽=218}}</ref> 안남의 [[쩐 왕조]]는 1288년 [[박당강 전투 (1288년)|바익당 강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했다. 쩐, 버간, 참파는 몽골제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신속했다.<ref>{{서적 인용|저자=Rossabi, Morris|날짜=1994|제목=The reign of Khubilai Khan|총서=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권=6|출판사=Cambridge University Press|isbn=978-0-521-24331-5|쪽=218~219}}</ref> 또한 몽골제국은 1284년과 1286년 [[사할린 섬]]의 [[아이누]] 계통의 골외(骨嵬)에 대한 원정을 통해 사할린 섬을 정복하고 만호부를 설치했다.<ref>{{저널 인용|제목=몽골의 骨嵬 정벌과 아이누의 형성과정|저널=서울大 東洋史學科 論集|저자=金玄耿|url=https://www.earticle.net/Article/A37403|날짜=2006년|총서=|호=30|출판사=[[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쪽=240}}</ref>
 
당시 몽골제국의 지배층이었던 몽골인들과 달리 [[한족|한인]]들은 대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남과 북 사이의 오랜 대립이 종식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세계가 회복되었다고 보았다. 한인 지식인들은 대원을 [[한나라|한]]·[[당나라|당]]·[[남송|송]]의 뒤를 이은 중국의 정통왕조임을 강조하였는데 이의 일환으로 쿠빌라이 카안의 즉위 초년부터 [[요나라|요]]·[[금나라|금]]의 [[정사]]를 편찬할 것을 주장했다.<ref>{{저널 인용|저자=김호동|제목=몽골제국과 '大元'|날짜=2006년 12월|url=http://dlps.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2007032904&sysid=nhn|저널=歷史學報|권=192|쪽=229~230}}</ref> 이후 1276년, 몽골제국이 남송의 수도인 임안을 정복함과 동시에 황실도서의 완전한 보존을 명령하면서 사서 편찬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정복 후의 정사 편찬사업은 정통론 시비로 지체되었다. 송을 본기(本紀)에 기록하고 요와 금은 각각 재기(載記)에 기록해야 한다는 주장과 요와 금을 북사(北史)로 편찬하고, 송은 송사(宋史)·남송사(南宋史)로 분찬하자는 견해 등 다양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삼국 모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각각의 연호를 사용한다(三國各與正統, 各繫其年號)”는 원칙이 확정되었다.<ref>{{웹 인용|url=http://contents.nahf.or.kr/item/itemFront.do?levelId=jo.d_0021&srcXml=level&title=%EC%99%B8%EA%B5%AD%EC%A0%84%20%ED%95%B4%EC%A0%9C&name=biblioExplanation&type=%EC%99%B8%EA%B5%AD%EC%A0%84%20%ED%95%B4%EC%A0%9C#self|제목=동북아역사넷|확인날짜=2019-06-08}}</ref> 이러한 역사 기록의 조정은 하늘 아래 두 가지 동등한 황제제도의 존재가 함께 존재했음을 인정하였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대한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국 황제제도가 가진 중대한 특성, 곧 단일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몽골제국의 카안 제도로 대체되었다. 중국인들은 카안들을 황제라 불렀으나, 이들 황제는 단지 전통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방대한 몽골제국과 그 후계 국가들을 지배하는 카안의 여러 일면 중 중국적 성격만을 의미했을 뿐이다.<ref>{{서적 인용|저자1=Reuven Amitai-Preiss|저자2=David O. Morgan|날짜=1999|제목=The Mongol Empire & its Legacy|출판사=BRILL|쪽=260~273}}</ref>
 
=== 쇠퇴===
[[1307년]] [[원 성종|테무르 카안]]이 42세의 나이로 붕어하자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ref>{{서적 인용|저자=김호동|제목=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시리즈=아틀라스 역사 시리즈|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쪽=146}}</ref> 이후 카안 울루스는 [[토곤 테무르]]가 카안으로 등극 이전까지 30여 년의 기간 동안 카안과 정후(正后)에 대한 독살과 피살이 반복되어 카안의 평균 재위기간이 3년 정도에 불과한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된다.<ref>{{저널 인용|저자=윤은숙|제목=大元帝國 말기 奇皇后의 內禪시도|저널=몽골학|권=47|출판사=한국몽골학회|날짜=2016년 11월|쪽=3}}</ref>
 
몽골제국의 카안의 권력은 [[원 문종|툭 테무르 자야아투 카안]]과 토곤 테무르 카안의 재위 초기에 크게 실추되었다. 황권 실추의 결정적 계기는 1328년에 발발한 양도내전(兩都內戰)이다. [[킵차크인|킵착계]] 군벌 [[엘 테무르]]는 [[원 태정제|예순 테무르]]가 상도에서 붕어하자 [[원 무종|카이샨]]과 [[원 인종|아유르바르와다]] 간의 정치적 계약을 들어 카이샨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툭 테무르를 옹립하려 하였다.<ref>《[[원사]]》 권31, 「明宗本紀」.</ref> 이에 맞서 상도에서도 예순 테무르의 장남 아리기바를 옹립하면서 양자의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1328년 8월에 엘 테무르는 주요 관원들을 감옥에 가두며 쿠데타를 일으키고 상도에서 보낸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본격적인 권신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ref>{{저널 인용|저자=윤은숙|제목=元代 중⋅후기 皇權과 權臣 -톡 테무르와 토곤 테무르 시기를 중심으로-|저널=탐라문화|권=60|출판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날짜=2019년 2월|쪽=142}}</ref>
 
토곤 테무르 카안은 권신에 의해 변질된 주종적 군신관계를 원대 전반기로 회복시킴으로서 정치 환경을 정상화하려 했다. [[바얀]]이 체첵투를 죽인 사건을 군신간의 주종관계로 확대 해석해 강력히 처벌했을 뿐만 아니라 [[토크토|톡토아]]의 중서성 복귀를 희망했음에도 그가 노비를 자청할 때까지 기다림으로써 사적 주종관계를 명확히 했다. 또한 어사대의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권력을 잡은 중서우승상과 대립하던 인물들을 어사대부로 임명해 상호 견제 기능을 강화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토곤 테무르 카안은 37여 년 동안 군주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그의 재위기간동안 엘 테무르나 바얀 같은 권신은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았다.<ref>{{저널 인용|저자=윤은숙|제목=元代 중⋅후기 皇權과 權臣 -톡 테무르와 토곤 테무르 시기를 중심으로-|저널=탐라문화|권=60|출판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날짜=2019년 2월|쪽=142}}</ref> 그러나 톡토아 파와 베르케 부케파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친정체제를 구축하던 토곤 테무르 카안은 견제와 균형이 무너진 조정에서 개혁의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고,<ref>{{저널 인용|저자=윤은숙|제목=元末 토곤 테무르 카안의 宰相政治와 黨爭 ― 톡토 派와 베르케 부카 派의 대립을 중심으로 ―|저널=중앙아시아연구|권=2|출판사=중앙아시아학회|날짜=2018년 12월|쪽=185}}</ref> [[기황후]]와 [[아유시리다라]]의 내선시도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채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다.<ref>{{저널 인용|저자=윤은숙|제목=元代 중⋅후기 皇權과 權臣 -톡 테무르와 토곤 테무르 시기를 중심으로-|저널=탐라문화|권=60|출판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날짜=2019년 2월|쪽=158}}</ref> 그는 두 차례에 걸친 내선시도와 군벌 간의 대립으로 실권을 상실하고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하게 되자 황태자 아유시라다라에게 권력을 이양했다.<ref>{{저널 인용|저자=윤은숙|제목=元末 토곤 테무르 카안의 耽羅宮殿|저널=탐라문화|권=53|출판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날짜=2016년 10월}}</ref>
 
원대 후반기에 이르러 궁정의 내분과 정치 부패로 말미암은 사회불안, 빈번한 [[황하]]의 대범람과 같은 자연재해, 재정의 궁핍을 교초의 남발로 막고자 하였던 정책의 실패 그리고 황하의 제방공사를 위해 추가된 강제노역 등은 남인들의 큰 원한을 샀다. 결국 이는 종교반란, 농민반란으로 이어졌다.<ref>{{저널 인용|저자=김경록|제목=명초 홍무제의 군사인식과 군사정책|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725359&language=ko_KR|저널=군사지|호=99|출판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날짜=2016년 6월|쪽=148}}</ref>
 
톡토아는 대주(大周)의 오왕을 자칭한 [[장사성]]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점했지만, 중앙정부에서는 권력투쟁이 벌어져 토곤 테무르 카안은 톡토아의 병권을 박탈하여 진압군의 사기가 저해되었다. 톡토아가 제거된 후 [[차간 테무르]]의 아들 [[쿠케 테무르]]와 동쪽의 볼로 테무르는 홍군과 강남의 한인군웅에 대한 군사작전보다 상호간 세력다툼 및 황실과 연결된 정치적 입장의 반목으로 권력투쟁을 지속했다. 1365년 쿠케 테무르가 최종적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한인군웅에 대한 토벌을 전개하였지만, 개별 병력들이 군령을 받지 않는 사태가 벌어져 결국 실패하였다.<ref>{{저널 인용|저자=김경록|제목=명초 홍무제의 군사인식과 군사정책|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725359&language=ko_KR|저널=군사지|호=99|출판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날짜=2016년 6월|쪽=150~151}}</ref>
 
각지의 농민봉기 과정에서 성장한 [[주원장]]은 개인적인 능력과 시대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한인군웅으로 성장했으며, 군사적인 측면에서 지휘능력을 발휘하여 유력한 한인군웅들을 제압하고 [[명나라]]를 건국하였다.<ref>{{저널 인용|저자=김경록|제목=명초 홍무제의 군사인식과 군사정책|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725359&language=ko_KR|저널=군사지|호=99|출판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날짜=2016년 6월|쪽=185}}</ref>
 
주원장은 즉위 직후 북벌 계획을 세우고 신속하게 군대를 대도로 보내 몽골을 축출하려 했다. 몽골 정부는 명군의 신속한 북상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명군이 대도에서 하루 정도의 거리인 통주(通州)까지 이르자 급하게 북상을 결정하였다. 1369년 6월에 주원장은 토곤 테무르 카안이 피신한 상도를 공격케 했다. 명군이 진격해 오자 8월 토곤 테무르 카안은 상도에서 콩기라트부의 중심지인 응창(應昌)으로 피난했다가<ref>{{저널 인용|저자=윤은숙|제목=元末 토곤 테무르 카안의 耽羅宮殿|저널=탐라문화|권=53|출판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날짜=2016년 10월|쪽=214~215}}</ref> 그곳에서 병사하고, 기황후의 소생 아유시리다라가 카안으로 즉위하여 근거지를 [[카라코룸]]으로 옮겼다.<ref>{{서적 인용|저자=김호동|제목=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시리즈=아틀라스 역사 시리즈|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쪽=162}}</ref>
 
=== 북원 ===
{{본문|북원}}
카안 울루스는 쿠케 테무르 휘하의 10만여 병력, 운남의 양왕(梁王) 바자라와르미의 10만여 병력, 나가추의 20만여 병력 그리고 북상한 몽골군 등을 합하면 여전히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ref>{{서적 인용|저자=Идэр|날짜=2012|제목=Юань улсын Түшмэл Хѳх Тѳмѳр|출판사=МУШУАТХ|쪽=145}}</ref>
 
[[아유시리다라|빌릭투 카안]](아유시리다라)은 감숙 지역의 심아곡에서 명군에 패하고 북방으로 탈주한 쿠케 테무르와 협력하여 명군에 상당한 반격을 가했다.1378년 빌릭투 카안이 사망한 뒤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투구스 테무르]]가 카안에 즉위했다.<ref name="Kim">{{서적 인용|저자=김호동|제목=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시리즈=아틀라스 역사 시리즈|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쪽=166}}</ref>
 
한편 몽골의 반격에 주원장은 변경의 몽골 세력들에 대한 회유를 시도하였는데, 이때 금산과 농안 그리고 이통하 방면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무칼리]]의 후예인 [[나하추|나가추]]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ref name="Kim"/> 결국 나가추는 1387~88년경에 명나라에 투항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1=Willard J. Peterson|저자2=John King Fairbank|저자3=Denis Twitchett|제목=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권=7|쪽=158}}</ref> 1381~82년<ref>Raoul Naroll, Vern L. Bullough, Frada Naroll. Military deterrence in history: a pilot cross-historical survey, p. 97.</ref> 주원장은 30만여 명의 병력을 운남에 출병시키고 [[대리국|대리]]의 단씨 일족도 명군을 원조케 했다. 결국 북원을 원조하던 운남의 양왕 바자라와르미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자신의 부인 그리고 충신들과 함께 투신하였다.<ref>{{저널 인용|저자=배숙희|제목=元末ㆍ明初의 雲南과 故元 後裔의 濟州 移住|저널=東洋史學硏究|권=119|출판사=동양사학회|날짜=2012년 6월|쪽=197, 205}}</ref>
 
나가추의 투항 소식을 접한 우스칼 카안(투구스 테무르)은 쿨룬 부이르로 이동해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지만,<ref name="Kim"/> 1388년 오히려 명군이 훌룬 부이르 호 주변 몽골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약 7만 명의 몽골인들이 포로로 잡히고 몽골의 근거지인 카라코룸은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ref>Michael Prawdin, The Mongol Empire, its Rise and Legacy p. 389. Collier-MacMillan Ltd. Toronto</ref> 이후 우스칼 카안은 서쪽으로 도주하다가 톨라 강변에서 아릭 부케의 후예인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예수데르]]에게 피살당했다.<ref name="Kim"/> 이후 [[카안]]의 몽골인들의 권위는 오랜 기간 동안 약화되어 서몽골 지역의 [[오이라트]]의 흥기를 허용했다.<ref>H. H. Howorth. History of the Mongols, part I. The Mongols proper and the Kalmuks.</ref>
 
== 정치 ==
=== 행정 ===
[[쿠빌라이 카안]]은 동생 아릭 부케와의 계승 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카안의 지위에 올랐다. [[몽골제국]] 정체의 군주로서 그의 지위는 당시 울루스의 수장들 대다수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뭉케 카안의 치세 때부터 독자적인 지배권을 어느정도 인정받았던 [[킵차크 칸국|주치 울루스]]의 베르케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의 알구와 서아시아의 [[훌레구]]에게 그곳의 정주지대에 대한 관할권도 양도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카안의 직접적인 통치가 미치는 권역은 몽골 초원을 비롯하여 [[여진]]의 영역이었던 북중국 [[탕구트]]의 영역이었던 하서 지방 그리고 새로이 편입된 [[티베트]]로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쿠빌라이 카안과 그 후계자들이 직접 통치하던 이 지역을 당시 몽골인들은 '카안 울루스'라고 불렀다.<ref name="Hodong"/>
 
쿠빌라이 카안은 몽골제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자신의 막부가 있던 내몽골 금련천 부근으로 옮기고 그곳이 도성을 세웠다. 이것이 '상도'로 알려진 제국의 여름 수도이다. 그는 또한 폐허가 된 [[금나라]]의 수도 [[중도 대흥부|중도]] 부근이 새로운 도성을 축조했으니, 이것이 겨울 수도 '대도'이다. 쿠빌라이 카안은 봄이 되면 상도로 붓상해 그 부근에서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되면 남하해 대도와 그 인근에서 겨울을 보냈다. 카안이 있는 곳이 바로 주도가 되고 다른 곳에는 유수사를 두었다.<ref name="Hodong"/>
 
[[파일:Qol-un_ulus_map.jpg|섬네일|300px| 내몽골 일대와 화북(河北ㆍ山西ㆍ山東)을 포함하는 중서성 직할지 복리(腹裏, Qol-un Ulus).]]
 
카안 울루스는 중서성(中書省)과 그 파견 기관인 10여 개의 '[[행중서성]]'(行中書省)이 관할하는 지역들로 나뉘었다. 후에 만주 지역과 몽골 초원에도 요양행성과 영북행성(화림행성)이 설치되었다. 티베트는 일종의 특별관리 구역으로 [[팍파]] 교단의 지도자들이 관장하는 선정원이 다스리는 영역이었다.<ref name="Hodong"/> 쿠빌라이 카안은 즉위 초에 [[훌레구]]의 분봉 관계외에 티베트에 주둔하던 몽골 제왕들의 군대를 모두 철수시켰다.<ref>{{저널 인용|저자=최소영|제목=13세기 후반 티베트와 훌레구 울루스|날짜=2012년 6월|총서=중앙아시아연구|권=1|출판사=중앙아시아학회|쪽=31}}</ref> 중서성과 행성 아래에는 노(路), 부(府), 주(州), 현(縣)을 두었다. 일부 지역에는 행정과 군사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선위사를 두었다. 또한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樞密院),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御史臺)가 있었고, 지방에는 행추밀원과 행어사대가 설치되었다.<ref name="Hodong">{{서적 인용|author1=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page=144~145}}</ref> 원래 복속한 천산 위구르 왕국은 내정에 관해서는 그 군주에게 고창왕(高昌王)을 주어 기존의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치를 인정해주었다. 그 왕족은 부마(Güregen)가 되어 몽골 왕족·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쿠빌라이 가문의 공주와 혼인을 맺었다. 또한 이후에 복속한 고려는 12성에 포함되어 몽골인에 의해 지배되었다.<ref>森平雅彦「世界帝国のなかの高麗王」『モンゴル帝国の覇権と朝鮮半島』(世界史リブレット, 山川出版社.2011年5月) pp.32〜55</ref><ref group="주">{{서적 인용|author1=[[동북아역사재단]]|author2=[[경북대학교]] 한중교류연구원|authorlink=|title=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series=|publisher=동북아역사재단|year=2011|url=https://hflib.kr/|isbn=9788961872386|page=82~83, 86}}, 1270년에 친조했던 [[고려 원종]]이 몽골군을 앞세워 귀국할 때 원종의 요청에 따라 다루가치가 파견되었는데, [[무신정권]]이 종식된 뒤에도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자연히 설치되었다. 그 후 몽골은 1272년에 이익(李益)을, 1274년(충렬왕 즉위)에
흑적(黑的)을 다루가치로 파견하였으며, 그 밖에 부(副)다루가치와 다루가치경력(經歷)을 따로 두었다. 이는 다루가치가 고려에 상주하는 기관으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루가치는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는 동시에 고려에 파견된 몽골의 유일한 행정기관으로서 몽골의 요구를 고려에 전달하고 대행하는 역할을 하였다. 1278년 9월 모두 철수하여 다시 파견되지 않았다.</ref> 당시 고려국왕은 몽골제국의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영토와 백성을 가지고 있는 군주임과 동시에 칭기스 일족의 부마로서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제왕이었다.<ref name="KHD">>{{서적 인용|author1=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page=154}}</ref> 정동행성이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지방행정기관으로 기능하지는 않았지만,<ref>高柄翊(1961·1962),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上·下), 『歷史學報』 14·19.</ref> 정동행성 승상이라는 직책도 제국의 고위 관리라는 점에서 제국의 내적 존재였다. 고려의 정치적 위상은 이러한 국왕의 지위와 연동했기 때문에 이중적인 특징을 가졌다.<ref name="KHD"/>
 
=== 신분 제도와 민족 차별 ===
카안 울루스에는 공노제와 같은 노예제가 존재하였으며 구구(驅口)라 불리던 노예계층이 존재하였다. 구구라 불리는 사람들은 처우가 가축과 같아서 말, 소와 같은 사람 시장에서 가격을 책정해 매매했다.<ref>{{서적 인용|제목=至简中国史 : 大数据讲述中国大历史 |isbn=9791186639771}}</ref> 또 자국인 제일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 → [[색목인]]<ref group="주">색목인은 [[케레이트]], [[메르키트]], [[타타르 연맹|타타르]], [[위구르]], [[나이만]], [[탕구트]] 그리고 각지의 [[무슬림]]에 대한 통칭이다.</ref> → 한인<ref group="주">{{서적 인용|저자=劉浦江|날짜=1999|제목=遼金史論|출판사=遼寧大學出版社|쪽=109}}, 한인은 [[한족]]·[[거란]]·[[고려]]·[[여진]]·죽인대(竹因歹)·출리활대(朮里闊歹)·죽온(竹溫)·죽역대(竹亦歹)·[[발해]] 사람들에 대한 통칭이다.</ref> → 남인([[남송]]인)의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은 3~4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중앙의 장관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ref>『[[원사 (역사서)|원사]](元史)』 85권: "벼슬자리 따라 일상 업무가 있었고 직위 따라 정원(定員)이 있었다. 그 수장(首長)은 몽골인이 맡았으며 한인과 남인은 그를 보좌하였다(官有常職,位有常員,其長則蒙古人為之,而漢人 南人貳焉)."단, 우승상(右丞相)을 지냈던 [[사천택]](史天澤)은 예외였다.</ref> '색목인(色目人)'이라는 용어가 [[한문]] 이외의 다른 언어로 된 문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처음에 몽골제국의 키타이 지방에 대한 지배가 시작될 무렵 한족과 비한족을 구별할 필요에서 생겨난 명칭이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이외의 구분은 종족간의 차별을 위해 고안된 서열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법규와 풍속을 달리하는 집단들을 식별하고 구분해 각각의 법규와 풍속에 따라 규율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ref>{{저널 인용|저자=舩田善之|날짜=1999|제목=元朝治下の色目人について|총서=史學雜誌|쪽=108~9}}</ref><ref name="권용철">{{서적 인용|저자=데이비드 O. 모건|번역자=권용철|제목=몽골족의 역사|시리즈=역사 모노그래프|출판사=모노그래프|isbn=9788998309008|쪽=178}}</ref>
 
몽골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남긴 자료를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대해서 문제가 지적되고 있지만<ref name="권용철"/> 몽골제국의 지배층인 정(正) 몽골인들은 몽골인과 색목인들을 우대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카안 울루스의 중서성의 경우, 재상을 역임한 총 447명 중 몽골인이 51명, 색목인이 66명, 몽골인 혹은 색목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195명, 나머지 30%는 한인과 남인이 차지한 것으로 확인된다. 중서성에서 실질적인 최고직인 우승상의 경우 97.30%, 좌승상의 경우 90%, 평장정사의 경우에는 86.29%가 몽골인과 색목인으로 구성되었다.<ref>{{저널 인용|저자=張帆|제목=元代宰相制度硏究|출판사=北京大學出版社|날짜=1997}}</ref> [[1300년]] 발표된 카안 울루스의 음서(蔭敍) 규정에서는 “모든 색목인들은 한인보다 한 등급 높게 음서한다. 다루가치 자손과 관민관(管民官)이 동일하게 음서한다.” 그리고, “정몽골인과 [[카안]]이 잘 알고 있는 공신 가문 출신(根脚深重)자들은 카안이 직접 결정하도록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ref>《通制條格》 卷6, 選举 蔭例 , 268~269면.</ref> 즉 다루가치 임관에 있어도 정몽골인과 색목인들의 자제들은 한인 관원에 비해 우대를 받았다.<ref name="다루가치">{{저널 인용|저자=조원|제목=元 前期 達魯花赤의 제도화와 그 위상의 변화|총서=동아시아문화연구|권=51|날짜=2012년 5월|쪽=296쪽}}</ref>
 
== 문화 ==
몽골제국은 멀리 유럽에 펼쳐진 대제국으로서 [[참치 (제도)|참치]](站赤) 제도가 정비되자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실크 로드]]를 왕래하는 대상(隊商)도 증가하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기를 띠고 유럽의 선교사나 상인·여행가가 속속 동방 세계를 방문했다. 서방 문화의 유입 가운데서 중국에 전래한 이슬람 문화는 그 영향이 가장 현저하여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의 자연과학이나 미술에는 주목할 것이 많다. 중국의 전통 문화는 몽골이 무시했기 때문에 정체했다. 특히 유학의 경시는 학문 발전의 장해가 되었다. 반면 서민 문학은 성행하여 중국 문학사에서 한문·당시(唐詩)·송사(宋詞)와 견주는 대표적인 문학의 하나인 원곡(元曲)이라 불리는 희곡(戱曲)이 융성했다. 회화에서는 송의 원화체(院畵體)나 문인화(文人畵)의 화풍을 엮은 명장(名匠)이 배출되었다. 또한 카안 울루스의 종교 정책은 극히 관대하여 이슬람교·그리스도교가 상당히 퍼졌고, [[티베트 불교]]도 티베트에서 전파돼 중국 불교 역사에 이채를 던졌다.<ref name="global" />
 
=== 음악 ===
원대의 음악을 호악(胡樂, 오랑캐 음악)이라고 하였는데 원 간섭기 시절 [[고려]]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도입된 악기가 [[해금]]과 [[태평소]]다.
 
=== 미술 ===
원대의 화가는 화원계(畵院系), 문인계(文人系), 거기에 산수화의 이곽파(李郭派) 등 셋으로 대별된다. 원대에는 화원(畵院)의 제도는 없었고, 남송의 멸망과 더불어 화공(畵工)은 후원자를 상실하여, 대부분 [[저장 성|저장지방]](浙江地方)의 한 양식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중국내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었다. 화원계의 화인에 비하여 문인화가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어 [[동원]](董源)·[[미불]] 미우인(米友仁) 등과, 또 한편으로는 이곽파의 화가들도 [[이성 (당나라)|이성]](李成), [[곽희]](郭熙) 등을 스승으로 받들고, [[북송]]으로의 복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송의 여러 선학들의 예술의 본질은 상실되어 자연을 관찰하는 의욕도 희박해지고 기법상으로도 조잡하여, 산수화로서는 구도에 있어 통일성이 결여되고 화면의 원근 표현도 성공을 보지 못하였다. [[조맹부]]에서 비롯된 복고운동은 원말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오진 (원나라)|오진]](吳鎭), [[예찬]](倪瓚)의 4대가에 이르러 남종(南宗) 산수화풍의 전형이 완성케 되었다. 명말의 [[동기창]](董其昌)은 4대가 이후에 규범이 될 수 있는 강렬한 개성적인 작가는 없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방 아무개’라고 낙관한 산수화가 이의적(二義的)인 모사(模寫)는 아니고 독립된 작품으로서 성행하게 되었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2|제목=원대의 회화|주소=http://donation.enc.daum.net/wikidonation/ency.do?vol=021&code=003001001000016000}}</ref>
 
=== 문학 ===
가무(歌舞), 음곡(音曲), 연기(演技)를 통합한 중국식 오페라라고도 할 수 있는 원곡, 즉 원잡극(元雜劇)이야말로 바로 몽골 왕조의 지배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성숙하여 발전한 것이다. 원잡극은 희극(戱劇) 등(직접적으로는 金의 院本雜劇)을 계승하여 생겨난 것으로 배우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대사를 말하고 동작을 보이는 것인데, 대도(大都)에서 유행했기 때문에 북곡(北曲)이라 불린다. 원의 곡은 4막으로 이루어지며 비파(琵琶)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악기를 구사한다. 정말(正末), 정단(正旦)을 비롯하여 충말(沖末), 정(淨), 축(丑) 같은 배역이 정해지며, 주역의 말(末)과 단(旦)만이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 쉬운 구어(口語)를 한껏 구사하고 과거(科擧)의 문이 막힌 지식인층에서 작자(作者)를 끌어들여 신선한 문예의 한 장르로서 지위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대표작은 『서상기(西廂記)』 『한궁추(漢宮秋)』 등이다. 북곡이 엄격한 규칙을 갖는 데 반해 원의 중엽 이후 강남 지방에서 일어난 남곡(南曲)은 자유롭고 무대의 변화가 많고 화려하다. 남곡의 대표작으로는 『비파기(琵琶記)』가 있다.<ref name="global">{{글로벌세계대백과2|제목=원대의 문화|주소=}}</ref>
 
== 역대 카안 ==
<div align="center">
{{중국 황제 (패아지근)}}
{{중국 황제 (몽고)}}
{{중국 황제 (원)}}
{{중국 황제 (북원)}}
{{타타르의 대칸}}
</div>
 
== 같이 보기 ==
* [[정복왕조]]
* [[초야권]]
== 각주 ==
;내용주
<references group="주" />
 
;참조주
<references />
 
== 참고 문헌 ==
* {{글로벌}}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
 
{{전후 시대
| 나라 = [[몽골]]
| 전 = [[몽골 제국]]
| 후 = [[북원]]
| 현재문서 = 원나라
| 시작 =
| 종료 =
}}
{{전후 시대
| 나라 = [[중국]]
| 전 = [[몽골 제국]]
| 후 = [[명나라]]<br />[[북원]]
| 현재문서 = 원나라
| 시작 = [[1271년]]
| 종료 = [[1368년]]
}}
 
{{원나라}}
{{몽골제국의 칸국}}
{{몽골 제국}}
{{몽골 제국의 파편화}}
 
{{전거 통제}}
 
[[분류:원나라| ]]
[[분류:중국의 역사]]
[[분류:몽골의 역사]]
[[분류:몽골 제국]]
[[분류:보르지긴]]
[[분류:중앙아시아의 옛 나라]]
[[분류:몽골계 왕조]]